평등의 거짓말
평등의 거짓말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4.20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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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온 산이 초록으로 몽글몽글하다. 초록의 산은 조금 짙거나, 연한 것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 되고 있다. 자연은 꽃으로 피어도 좋고, 저렇게 잎으로 피어도 좋다. 자연의 원리를 두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없다. 그런데 매 순간 자연을 대하면서도 우리는 왜 자연의 모습을 닮지 못하는 것일까.
근대 사회주의 이념의 싹은 아마도 플라톤의 〈국가 Republic〉와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Utopia〉에 기반을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플라톤이 그린 국가와 토머스 모어의 소설 속 국가는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의 부정, 공동생활, 배우자와 자녀의 공유 등이 그 예이다. 어쨌거나 플라톤과 토머스 모어가 주장하는 큰 틀은 평등이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다.
오랜만에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을 꺼내 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명작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이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가 싶다. 10년 전쯤에 읽었던 소설이었음에도 다시 읽으니 또 다른 시각으로 읽히게 된다. 그때는 아이들의 논술 수업을 위해 읽었고, 지금은 오롯한 독서였으니 가슴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책을 읽는 것도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평등, 많은 이들이 그토록 소망하는 말이다. 하지만 지구 어디에도 완전한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우리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인간을 적으로 여기고 오직 동물들만이 친구라는 원칙을 기치로 내걸고 시작한 동물들의 혁명은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실제로 처음 얼마간은 모든 동물들이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글씨를 안다는 이유로 동물들의 권력을 쥔 돼지들의 비합리적인 논리는 점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물들의 원칙’이 변질되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라고 외치며 그들의 폭력을 눈감게 하는 스퀼러의 선동으로 대부분의 동물들은 권력자들의 폭력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폭력을 묵인했던 힘없는 동물들에게 돌아온 대가는 처참하기만 했다. 죄라면 소수의 돼지들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 착하기만 한 ‘복서’도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권력자들은 도살장에 팔아 버리고 만다.
‘동물농장’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이 소설은 처음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출간을 해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단순한 동물들의 이야기가 아닌 엄청난 정치적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정의’와 ‘평등’이라는 목표로 시작된 동물들의 혁명, 하지만 혁명으로 이룩된 나라는 점점 ‘정의’와 ‘평등’은 사라지고 소수 권력자들의 폭력만 난무하는 세상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평등한 아름다운 나라 ‘유토피아가’가 아닌 독재자의 지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디스토피아’일 뿐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수장도 소수의 정치가도 아니다. 그 나라의 국민이 올바른 눈과 귀와 입이 제대로 그 역할을 할 때만이 지킬 수 있는 법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소수 권력자들의 부패가 대다수 피지배자들의 무지로 인해 어떻게 변질되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꽃과 나무가 어떻게 피어나고 지는지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도 분명 아름다운 나라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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