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지구별 여행자
우리는 모두 지구별 여행자
  • 고은정 청주시 흥덕구 주민복지과 주무관
  • 승인 2021.03.0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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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고은정 청주시 흥덕구 주민복지과 주무관
고은정 청주시 흥덕구 주민복지과 주무관

 

꽤 오래전 여행 때의 일이다. 친구와 함께 온라인 숙박 플랫폼을 통해 숙소를 예약했는데 숙소에 도착한 우리를 반긴 것은 안내문이었다. 숙소에 머무는 동안 주의해야 할 것을 담은 리스트였다. A4 용지 한 장 가득히 빼곡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명시돼 있었다. 결론은 “당신의 집이 아니니 깨끗하게 사용하고 가세요.”였다.

결국 집에서보다도 분리배출을 더 철저히 했고 혹시나 기물이나 가구가 파손될까 봐 조심하면서 지냈다. 남의 것은 이렇게 불편한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렌터카를 타고 도시 곳곳을 누비며 여행을 시작하기까지 렌터카 사무실에서 또 한 번의 기나긴 주의사항을 들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행을 하면서 누린 모든 것은 모두 잠시 빌려 쓰는 것들뿐이었다. 숙소도 차량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 자연도.

마냥 행복한 여행은 늘 짧았고, 돌아온 일상은 평범하고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래서 소중함을 몰랐다. 코로나19로 인해 발이 묶여버린 요즘, 귀가 시간이 빨라졌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집 안 청소나 등한시했던 동네 산책 등을 통해 잃어버린 내 일상을 다시 찾게 된 건 코로나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일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 전봇대 홍보 포스터에 쓰인 문구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우리의 환경은 후손에게 잠시 빌려온 것.'

예전 같았으면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는 배경이었을 뿐이었는데 뭔지 모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깨달음일까, 부끄러움일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쌓여 있는 쓰레기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곳이 이제는 제법 깨끗해졌다.

부끄럽지만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네를 더 아끼는 이웃 누군가가 신경을 곤두세우며 치웠고, 새벽이면 청소 차량이 쓰레기를 수거 해갔다. 누군가의 수고스러움이 만든 변화를 잘 누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직장에 다다랐을 때 즈음 이십 대 초반에 읽었던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가 생각났다. 여행책인 줄 알고 읽었다가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 그 책이 떠오른 건 그때 내가 가졌던 마음가짐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지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그 시절의 내가 떠올라 부끄럽고 속상했다. 더 순수하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품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내 시간, 내 집, 내 주변도 챙기기 벅찬 게 사실이다.

인생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곳 또한 잠시 머물다 가는 곳으로 생각한다면 조금 더 멋진 `여행자'의 자세로 일상을 멋지게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안락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잃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좋은 여행지는 그맘때가 되면 또 가고 싶듯 우리가 눈뜨고 먹고사는 이 삶터라는 여행지를 가꾸는 것도 우리의 임무가 아닐까? 내일부터라도 어제보다는 더 성숙한 일상의 여행자가 돼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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