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경계
고독의 경계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1.2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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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을 온전히 알아가는 일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청년기의 열정과 어른이 된 후의 삶의 흔적들을 따라가는 일이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다. 눈부신 아름다운 순간보다는 에이는 아픔과 상처의 나날이 더 깊기에 작가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고독은 언제나 장식처럼 삶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기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발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작품임에도 많은 독자들은 이 첫 구절을 명문장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자는 책을 읽을 때 무엇부터 할까.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읽는 편이다. 작품을 그냥 읽는 것과 작가를 알아본 다음에 읽는 것은 천양지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이해도 면에서도 달라진다.

《설국》을 읽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기에 관심이 갖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약 작가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중도에 읽는 것을 그만두었을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플롯이 없으며 주제도 모호하기 때문이다. 작품 곳곳에 드리워진 허무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인내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도쿄에서 온 남자 시마무라와, 약혼자 유키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게이샤가 된 고마코, 그리고 유키오를 간호하던 요코, 세 주인공들의 관계도는 너무도 무미건조하다. 세 주인공들의 시선이 한데 모아지는 경우도 없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 속에 빠져들지도 못했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세 사람의 곁을 맴돌 뿐이었다.

그 이유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삶은 뜨거운 불꽃이 되지 못했다. 아니 그에게 삶은 `허무'그 자체였다. 세 살 이전에 부모님을 잃고, 17살 이전에 조부모와 누이를 잃는 고아가 되어 버렸으니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죽음'이 웃고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그의 삶은 주인공들 삶을 그렇게 `헛수고'로 만들어 놓는다. 그는 《설국》 말미에 요코가 극장으로 쓰던 창고에서 불이 나 떨어져 죽을 때에도 가슴 저린 슬픔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창고에서 떨어지는 여인의 몸을 황홀하게 표현할 뿐이었다. 오히려 아름다운 은하수를 `시마무라'가슴속으로 흘러들게 한다. 그는 작품에 죽음을 쓰지 않는다. 살아 있는 순간만을 쓴다. 그것을 반증하듯 실제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74세 때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끊어내고 말았다.

똥색을 탓하지 않는 달팽이라는 말이 있다. 달팽이는 초록색 나뭇잎을 먹으면 초록색 똥을, 노란색 꽃을 먹으면 노란색 똥을, 주황색 당근을 먹으면 주황색 똥을. 하얀 양배추를 먹으면 하얀 똥을 눈다. 작가가 글을 쓰는 일도 이와 같을 것이다.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글의 색깔이 달라진다. 어디 작가만이 그럴까. 책을 읽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어떤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책 한 권에 담긴 작가의 세계는 어마어마하게 깊고 무겁다. 그런데 과연 우리 중에 그 깊이와 넓이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제부터라도 책 한 권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겠다. 그래야 나도 쉽게 글을 쓰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눈이 이틀만 내리면 전봇대가 파묻힌다는 에치고유자와, 시마무라를 기다리는 고마코가 사는 그곳은 지금쯤 설국이 되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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