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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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진희 기자
  • 승인 2021.01.19 1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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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공진희 부장(진천주재)

 

출발은 터미널이었다.

세상이 궁금한 꼬마가 계속 목을 길게 내밀며 밖을 보려 애를 쓰자 차창가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꼬마를 끌어다 무릎 위에 앉혔다.

차창 밖으로 어둠이 내려 바깥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어선들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고 드럼통처럼 생긴 것들이 강 위에 둥둥 떠다니던 모습이 그 꼬마의 뇌리에 박힌 한강의 첫 풍경이었다.

아홉 살 즈음 여름방학을 맞아 찾아간 서울의 또 다른 기억은 망원경이었다. 집안 아주머니의 내 또래 아들이 옥상에서 망원경으로 동네 풍경을 보여 주었다. 저 멀리 육안으로 보이던 교회의 십자가가 렌즈를 통해 바로 눈앞에 나타나자 놀람과 신기함이 함께 몰려왔다.

망원경 놀이에 빠진 나를 지켜보던 아주머니께서 혀를 끌끌 차며 아버지에게 한마디 하셨다.

`아니 어린애한테 무슨 슬리퍼를 신겨서 데리고 왔어?'

`서울은 도로가 깨끗할 테니 여름에는 시원한 슬리퍼가 좋겠지'하는 꼬마의 엉뚱한 상상이 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친구들과 산과 개울을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며 놀던 소년의 발에 구두가 신겨졌다. 기차표 케미 슈즈.

타잔을 만나기 위해 친구집 TV를 목이 빠지게 보고 있자면 광고에 나오던 그 구두가 내 발에서 전리품처럼 빛나고 있었다.

출발할 때와 같은 공간이지만 이제는 목적지로 바뀐 진천 터미널에 개선장군처럼 도착했다.

유년 시절에는 터미널보다는 차부라고 불렀다.

비가 오거나 궂은 날에는 구두를 신지 않았다. 구두를 신고 학교에 가는 날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망원경 이야기를 곁들이며 신문물 전파에 열을 올렸다.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터미널과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옛날보다 줄기는 했지만 최근에는 터미널과 역 주변에 대기실과 화장실, 매점과 식당, 서점, 영화관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며 다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문을 열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니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시선이 천정에 설치된 TV화면에 꽂혀 있다.TV에서는 코로나 관련 뉴스가 한창이다.

국내소식은 물론이고 해외 소식까지 곁들여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 소식을 전해주는 기자, 그 기자와 인터뷰하는 사람들, 그리고 TV를 보는 사람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제는 마스크 쓰는 습관이 옷을 입듯 자연스러운 새로운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코로나 소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손바닥의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떨군다.

한쪽에서는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정겨운 풍경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니 우리말이 아니다.

터미널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서 외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글로벌 시대의 또 다른 모습이다.

대기실 의자 한쪽에서는 차를 기다리는지, 사람을 기다리는지, 기다림에 지친 중년 사내가 졸고 있다.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들의 등에는 배낭이, 손에는 손가방과 캐리어가 들려 있다. 그 가방 안에는 각자의 삶의 무게와 또 그만큼의 희망이 담겨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우리네 삶이 점점 팍팍해지고 있다. 터미널에서 출발할 때의 기대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결과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가방 안에 꾹꾹 눌러 담은 희망을 지켜내야 하기에 터미널을 오가는 사람들은 오늘도 하루를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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