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논란, 법원 판단에 맡기자
사찰 논란, 법원 판단에 맡기자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11.2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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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대통령을 거쳤다. 인사권자인 대통령들은 그의 오만방자한 처신이 못마땅했지만 누구도 자르지 못했다. 당대 시사잡지 `라이프'는 후버를 미국의 황제라고 불렀다. 그에게 끌려다니는 대통령을 조롱한 표현이었다.

그의 장기는 사찰이었다. 후버가 FBI를 맡던 시절 요원들에게 미행, 감시, 도·감청은 일상이었다. 약발이 잘 먹는 혼외정사와 부정축재를 캐내는 데 주력했다. 확보한 정보로 당사자를 위협해 다른 인사의 약점을 캐냈다. 그걸 무기로 각계 실력자들을 손아귀에 쥐고 정치를 주물렀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도 후버 앞에서는 쩔쩔맸다. FBI의 집요한 도감청에 불륜현장을 잡혔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생을 후버의 직속상관인 법무장관으로 거느린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분방한 사생활을 즐겼던 케네디에 대한 후버의 사찰 파일이 너무나 두툼했기 때문이다. 부통령 시절부터 여자문제로 후버에게 덜미를 잡혔던 린든 존슨은 대통령 취임 후 참모들의 경질 건의를 뿌리치고 그를 종신 국장에 임명했다.

박정희의 군부독재 시절 중앙정보부는 FBI의 행실을 그대로 본받았다. 미행과 감시는 다반사였고 도감청은 피아를 구분하지도 않았다. 일선 경찰서 정보형사들이 올리는 동향보고 가운데 야당 인사의 여자문제가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았다. 혼외정사 증거를 들이대면 대부분 고개를 떨구고 굴복했다. 선거를 목전에 둔 야당 정치인이 돌연 출마포기 선언을 할 경우 중정의 공작이 의심을 받았고, 대부분 나중에 사실로 확인됐다.

최근 주요 재판을 담당한 판사들의 이력과 성향을 기록한 검찰 문건이 사찰 논란을 빚고 있다. 여권에서는 3공시절 망령이 살아났다는 비난까지 터진다. 우선 공조직이 당사자 동의 없이 신상정보를 수집해 문서화 하고 공유했다는 사실 자체로 문건은 심각한 하자를 갖는다. 검사의 공판업무(기소유지)는 담당 판사의 출신성분이나 재판진행 스타일 따위가 아니라 충분한 증거와 이를 범죄행위에 연계하는 정연한 논리로 전개돼야 한다. 판사를 특정하고 `법정에서 존재감이 없다'거나 `전날 술을 마시고 업무를 태만히 했다'등의 악평을 적시한 공문서는 당사자의 명예훼손 소송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만일 경찰이 검찰관련 문건을 만들고 특정 검사에 대해 `변호사가 룸살롱에서 부르면 달려가 술을 얻어마시는 위인'이라고 썼다면 경찰 본연의 업무일 뿐이라며 못 본 척할 것인가?

그렇다고 부적절한 정보수집 행위 이상으로 볼만한 증거가 없는 사안을 무리하게 사찰로 몰아가는 것도 옳지 않다. 통상 사찰은 불법행위를 수반했을 때 인정된다. 2016년 세월호 유족들을 사찰했던 기무사가 작성한 보고서는 지금 검찰의 문건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신상정보가 주를 이뤘고, 가벼운 동향들이 기록됐을 뿐이다. 검찰문건이 한 판사에 대해 `농구를 잘해 대학 때부터 유명했다'고 소개했듯이 한 유족에 대해 `대학 때부터 LG(프로야구) 골수 팬'이라는 생뚱맞은 내용을 담기도 했다. 그러나 관련된 기무사 책임자들은 대부분 유죄를 받았다. 불법적 수단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기무사 요원들은 가족처럼 위장하고 유족들 사이에 끼어들어 동태를 파악했다. 관련기관을 수시로 도감청한 사실도 드러났다.

지금 사찰 시비에 휘말린 검찰문건의 작성 경로에서 아직 이 같은 불법행위는 드러나지 않았다. 판사들도 문제는 인정하지만 사찰 혐의를 놓고서는 견해가 갈린다. 여론도 뚜렷한 근거 없이 검찰총장을 불법사찰의 주모자로 몰아 업무를 박탈한 것은 지나치다는 쪽으로 기운다.

물론 당사자 동의 없는 일방적 행위, 모욕적인 내용의 기재 등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철저한 감찰과 엄중한 인책이 필요하지만 징계의 수위는 규명된 사실에 준해야 한다. 오늘 법원이 윤석열 총장이 제기한 직무정지명령 취소 가처분 신청을 심의한다. 법원은 이번 사태의 한 당사자이자 피해집단이다. 그들이 내릴 결론이 더 주목받는 이유다.

법무부는 오늘 법원의 판단을 준거 삼아 향후 일정을 밟아가길 바란다. 지금 세간에는 정부가 치명상을 입게 될지도 모를 검찰수사를 막기 위해 무리수를 동원하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돌고 있다. 낭설을 정설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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