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리 향처럼
백리 향처럼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0.11.26 1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늦가을의 햇살이 내려앉은 아침, 마당이 참 고요하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갈무리에 들어갔다. 대문밖에 자박자박 겨울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마당으로 나가면 살 속을 파고드는 바람이 제법 맵다. 어쩌면 가을은 마무리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게다.

세상의 따스한 것들은 다 겨울에 있는 것 같다. TV에서 벽난로 위 주전자가 뚜껑을 달그락거리며 하얀 김을 내뿜는다. 벽난로에서 불꽃이 흐르고, 그림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함이 느껴진다. 따끈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어진다. 털 스웨터. 털목도리. 털장갑, 포장마차, 군고구마, 크리스마스 이브의 불빛 생각만으로도 겨울이 따뜻해진다.

내 나이 육십하고도 한참이 더 있다. 어떤 날은 의욕이 넘치다가도 어떤 날은 이 나이에 뭘 욕심을 부리나 싶어서 슬쩍 물러서게 된다.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혹한을 만날 때가 있다. 혹한을 만나는 것은 순간이다. 우리도 도장 한번 잘 못 찍어 긴 겨울을 살아야 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혹한을 견디고 있다. 외출이 불편하거나 마스크를 써야 하는 것은 조금 불편할 뿐이다. 사람을 만나야 살아갈 수 있는, 침체된 시장경제로 인해 많은 사람이 떨고 있다. 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가까운 이웃, 천 평이 넘는 밭에 유기농으로 심어놓은 무밭이 있다. 그것이 팔리지 않아 헐값에 넘기고 농사를 지은 아저씨는 요즈음 볼 수가 없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가장 낮은 곳의 삶부터 추위가 스며든다.

나는 지금도 찬바람이 불면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작은 암자에서 하룻밤 묵어 오는 일이다. 내 인생의 혹한기, 인생에 대한 회의가 들어 나 자신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때 영동의 작은 암자에서 묵었던 일이 있었다. 그날 밤 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와 온돌방의 뜨끈뜨끈한 온기가 내 추위를 다 녹여주었다. 세상이 다 뜨거워진 듯 위로를 받았었다. 혹한을 만나 본 사람은 추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 그리고 한 번 얼어붙은 추위를 녹이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쉽게 불을 꺼트리지 않는다.

마당에는 한 번의 서리에도 견디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꽃들이 많다. 그런데 백리향은 된서리에도 독하게 푸른 잎을 지키고 있다. 나는 백리향을 볼 때마다 저 독기가 있으니 그 진한 향기를 꽃 속에 품고 있다가 그 멀리까지 향기를 보내지 싶다. 그 독기가 없다면 그 추운 겨울을 어찌 견뎌 내겠는가. 백리향은 추위에 강하고 더위는 물론 건조에도 강하다. 줄기가 옆으로 포복하면서 자란다. 우리도 백리향처럼 이 코로나의 위기를 독하게 견뎌 내야 한다.

뒷산에 수령이 오래된 아까시나무는 잎을 떨군지 오랜데 올해 새로 생겨난 어린줄기는 아직도 파란 잎을 달고 있다. 오래 살아온 나무는 미련을 빨리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보다. 아무리 머물고 싶은 자리도 때가 되면 물러설 줄 알아야 아름답다. 백리향처럼 독기도 없으면서 잎을 떨어내지 못하는 어린나무가 안쓰럽다. 파울 틸리치의 진정한 용기란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보다 덜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라는 말을 늦가을 아침, 마당에서 중얼거려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