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농부의 마음이 되어
가을, 농부의 마음이 되어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0.11.1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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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길가에 노란 융단처럼 은행잎이 내려앉았다. 가을은 어느새 깊어가고 곱게 물든 단풍에 눈길도 제대로 주지 못해 아쉬운 마음인데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우리 지역엔 이미 나뭇잎들을 떨구어내고 있다. 순환하는 계절에 겸허히 순응하는 자연의 섭리를 보며 잠시 발길을 멈춰본다.

사계절 가운데 가을은 유독 짧게 느껴진다. 밭작물을 조금씩 심고 가꾸어 거두다 보니 추수시기인 가을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난다. 올해에는 몸과 마음은 바쁘지만 추수하는 즐거움은 그리 풍요롭지가 못하다. 여름엔 긴긴 장마 때문에 농작물이 망가지고 가을엔 가뭄이 심해 김장 배추가 속을 채우지 못했다.

엊그제 미장원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남편 퇴직 후 칠백여 평 밭에 농사를 짓는다는 그녀는 여러 해 농사를 지었지만 해마다 참깨 수확을 세 가마니씩 수확했었다고 했다. 올해는 장마피해로 참깨를 한 말도 못 거두고 남편이 허탈한 마음을 추스르며 이 모작으로 알타리 무 등 김장용 무를 심었다고 한다. 시퍼런 무청이 달린 큼직한 무를 승용차에 싣고 아름아름 판로를 찾아 나선 중이란다. 나도 무를 심지 않았다면 흔쾌히 사고 싶을 만큼 무는 좋아 보였다. 그 부부는 며칠 전 기온이 떨어진다는 일기예보에 알타리 무를 뽑아 승용차에 가득 싣고 농산물 공판장에 가져가 시중가격 오분의 일도 안 되는 헐값에 넘겼다고 했다. 수확하는 인건비도 안 되어 보이는 농부의 손에든 금액에 듣는 이들의 마음도 안타까웠다.

마음 좋은 미용실 원장은 이곳저곳 전화를 걸어 무를 소개했다. 김장철인지라 지나가던 이들도 무를 보고 주문이 이어졌다. 무 다섯 개를 넣은 망을 들어보니 제법 묵직했다. 더러는 집까지 배달을 요청하는 이들도 있어 힘들어 보일 법도 한데 그 부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가격도 저렴하여 큰 수입이 되지는 않아 보여도 일단 판로가 없어 애면글면하던 터라 무를 판매함에 안도의 한숨을 짓는듯하였다.

아파트 현관 옆에 노란색 단풍나무가 한창 곱다. 고층 아파트에 가려 햇볕을 받지 못하여서인지 늦게 단풍잎 물들이기에 여념이 없는듯하다. 인근에 나무들은 이미 빨강, 노랑으로 곱게 물들었던 잎들을 떨구고 있는데 이곳에 나무들은 뒤늦게 계절을 쫓아가고 있다. 단풍나무 옆에 산수유나무도 마찬가지다. 아직 파란 잎사귀에 빨간 산수유 열매를 익히고 있는 중이다. 돌아보니 봄에도 이곳 나무들은 초여름 날씨가 되어서야 늦은 봄꽃을 피웠었다. 목련나무가 그랬고 봄의 전령사라는 산수유나무가 꽃들을 아주 늦게 피워냈었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다. 고층아파트 뒤 그늘진 곳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서두르지 않고 늦으면 늦은 대로 본연의 할 일을 다 하는 듯하다. 환경을 탓하지 않고 어려움을 묵묵히 헤쳐나가는 무를 파는 부부처럼 아파트 뒤 화단의 나무들도 척박함을 탓하지 않는 듯하다. 덕분에 화려한 단풍이 즐비한 풍경은 아닐지라도 때늦은 단풍 구경이 고맙고 즐겁다. 농부의 마음이나 나무들의 모습에서 자연 앞에 본연의 의무를 다하며 때가 되면 내려놓는 겸허함을 일깨워 주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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