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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6.0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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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자유와 민주의 길항관계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미국 워싱턴에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가 있다. 비(碑)보다는 기념물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이 공공미술품은 설치 당시 격렬한 논쟁을 거치면서 그 예술적 가치를 당당하게 인정받고 있다.

결코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기념하려는 생각이 정부가 아닌 참전용사 단체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이 기념물이 갖는 일차적 상징성이다.

땅 속으로의 지향성을 추구하는 이 기념물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대부분의 기념비(혹은 기념탑)들과 대조적인 모습이어서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1981년 공모를 통해 1421점의 응모작 가운데 당선의 영광이 돌아간 것은 당시 22세에 불과했던 중국계 미국인 마야 린(Maya Lin)이었다.

기념물 건립을 주도한 베트남 참전군인 기념물 재단은 묵상적일 것,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룰 것, 죽은 병사의 이름이 어딘가에 들어갈 것, 어떤 정치적 발언도 자제하는 비정치적 작품일 것 등을 주문했다.

그러나 '땅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이 작품은 성조기와 영웅적으로 묘사된 군인들, 미화된 전쟁장면 등이 배제됐다는 점에서 수정, 보완되는 진통을 겪음으로써 결코 정치적이라는 수식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마야 린은 "전쟁의 실상, 전쟁에서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참전자들과 전사자들에 대한 기억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정치적인 접근이 디자인의 근본적인 목표라고 강조한 그녀는 전쟁을 찬양하거나 미화하는 대신 생명의 소중함을 기억하면서 죽음에 대해 보다 정직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상실감을 극복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본질적인 진실은 전투복을 입은 군인 3명과 여군의 조각이 극사실적으로 더해지는 타협을 통해 왜곡되는 결과를 낳는다.

작품의 미적인 측면이 시민적 기념물로의 정치적 기능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부근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관은 전쟁기념관 같은 공공미술에서의 왜곡과 은폐성향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비옷을 입은 19명의 군인들이 행군하는 모습과 2400여명 참전용사의 초상이 음각된 이 기념물은 한국전에서 희생된 6만8000여명 병사들의 넋을 기린다는 취지로 지난 1995년 7월 건립되었다.

이 기념물에서 정작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은 한쪽 벽에 새겨진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짧은 글귀다. 전쟁 기념관이 단순화의 반복을 통해 대중들에게 기억돼야 할 것을 알려주는 장소이긴 하나, 유독 '자유'만이 강조된다는 점은 전쟁의 참상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는 본질의 왜곡이다.

'우리 국민은 알지 못하는 나라와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요구에 응답했던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은 또 어떤가.

미국의 희생정신과 세계 평화를 위한 노력만을 돋보이게 하는 그 글귀에는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위상과 그들만의 굴절된 긍지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속내가 아닌지 사뭇 궁금하다.

다시 6월이다. 유독 '전쟁의 상흔'이라는 글귀가 회자되는 이 달에 우리는 '자유'와 '민주'사이에 묘한 길항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한국의 현대사를 인식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동일한 구호에도 여전히 거듭되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 속에서 호국보훈의 달과 6월 항쟁 20주년은 공존한다.

'자유'와 '민주'의 묘한 공존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생명의 희생에 대한 기억을 길이 이어가는 것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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