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표현하는 인문학 책 놀이
몸으로 표현하는 인문학 책 놀이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0.10.0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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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몸으로 표현하는 인문학 책 놀이는 입체적 독서를 통한 양면 보기와 전체 보기이다. 입체적 독서 놀이는 지금까지 비판 없이 수용한 근대적 가치들에 대한 편견 깨기와 망치 가함이며 인문학적, 생태학적, 통섭적 사고로의 전환이다.

통섭統攝은 영국의 역사가이며 철학가인 윌리엄 휴웰(William Whewell)이 그의 저서 『귀납적 과학의 철학』(1840)에서 처음 사용한 낱말로서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통섭, 지식의 대통합』(1975)을 통해 다시 부각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가 다시 풍성한 지식의 반찬이란 부제로 『통섭의 식탁』(2015)을 발간하면서 일반화했다.

무엇보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방법론은 소통을 통한 공감 능력과 협업을 통한 창의 능력이다. `큰 줄기를 잡다'라는 의미의 통섭은 오늘날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융합적 사고로 확장했다. 통섭은 학문 간 경계를 뛰어넘고 매체 간 협업을 통해서 큰 줄기를 찾는 방식이다.

이렇게 각 분야 간 경계를 허물고 큰 그림을 잡는 통섭적 사고로 전환하는 가운데 독서 교육 방식에도 새로운 협업 방식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하여 예술교육 전문가 과정에서 학교 내 독서교육 프로그램으로 제안한 발표 주제가 `몸으로 표현하는 통섭형 인문학 책 놀이'였다.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하고 열심히 노동하여 만족할 만큼의 자본을 획득하는 데도 왜 우리는 늘 허기를 느끼는가. 아마도 경쟁 구도로 점철된 야만적 시스템과 우열을 가리는 이분법적 야수 체계를 무비판적으로 습득한 가운데 그 기준에 빗대어 늘 자가 점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폭력적인 궤도를 수정하지 않는 한 우리나라의 행복 지수는 항상 밑바닥이다. 타자와의 비교를 통한 행복은 종점이 없다. 늘 끊임없이 가동되는 피곤한 노동력만 증폭할 뿐이다. 우리는 이미 행복의 파랑새는 밖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다양한 지식과 물질을 소유해도 내 안의 뇌 구조와 인식하는 기준을 바꾸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이번 도내 한 공립 중학교에서 진행하는 독서교육 특강 시간에 `입체적 독서가 필요한 이유'라는 주제로 언어 매체와 비언어 매체의 협업 독서를 진행할 예정이다. 양면 보기와 전체 보기를 통해 현상을 새롭게 해석함으로 무의식적으로 자리 잡은 우리 안의 편견을 발견하고 문학 장르와 타 장르의 협업을 통해 공동체가 행복한 수평적 세상을 찾아가는 새로운 방식이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야생의 삶』은 인식 기준을 바꾸는 대표적인 독서토론 텍스트다. 그릇된 상식과 통념들을 전복하고 공동체가 행복한 수평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21세기 독서 교육이 해야 할 급선무다. 최근 광장이라는 형식을 통해 유물 같은 신념들이 빚어낸 슬픈 광경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제대로 알 권리조차도 상실한 무지無知 역시 공동체의 삶을 피폐하고 파괴하는 폭력으로 작용한다.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야생의 삶』을 통해 학생들은 문명과 야생의 정의를 달리 정리하고 행복의 파랑새 공식을 새롭게 정립할 것이다. 방드르디와 로빈슨 크루소를 중립적이거나 각 주체로 보는 시점을 통해 오랜 기간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한 잘못된 신념과 가치관을 제대로 조명할 시간을 기대한다.

자본의 상징인 화물을 잃은 다음에야 자유를 찾은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 크루소'가 하늘 향해 외친 그 큰 울림이 온종일 허공을 맴돈다.

“해여, 나를 중력에서 벗어나게 해다오. 나를 방드르디와 닮게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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