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과 기원을 담은 거울(銅鏡)
염원과 기원을 담은 거울(銅鏡)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20.09.2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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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거울은 기본적으로 빛의 반사에 의해 사람의 모습이나 물건의 형태를 비추는 도구이다.

고고학상 가장 오래된 거울은 터키 차타르 히유크유적의 신석기시대 지층(기원전 6,000년경)에서 출토된 흑요석으로 만든 거울로 알려졌다. 청동으로 만든 거울은 서아시아에서 기원전 2000~2900년 전에 성행하였으며, 중국에서는 상(商)때부터 존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리에 주석, 아연을 섞어 만든 거울(銅鏡)로 청동기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형태와 문양을 바꾸어가며 만들어 사용하였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3개의 신물(神物)을 갖고 왔는데 그 중 거울이 포함되어 있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조선에서 제사장은 제천의식을 행할 때 동경을 몸에 매닮으로써 제사장의 위엄을 공고히 하는 신분상징물로 사용하였다. 삼국~통일신라시대에 거울은 출토예가 매우 적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수량과 양식이 다양화되고 급증하여 거울하면 고려경(高麗境)으로 인식되고 있다.

거울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거울은 그 자체로 비춘다는 성격을 갖고 있어 용모를 비추는 기본적인 기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나, 고고학적으로 유적에서 출토된 양상으로 보면 거울의 상징적인 의미에도 비중을 둘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은 생활 유구보다 오히려 제사, 신앙 관련 유적에서 대부분 출토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청주 금천도서관 건립부지에서 삼국시대 측구식탄요(側口式炭窯)를 파괴하고 고려시대 나무널무덤(木棺墓)가 조사되었다.

이 무덤은 소나무로 짠 나무널을 사용하여 주검을 묻었다. 나무널 안쪽 주검의 오른쪽 중앙부에 가상귀부(家常貴富)명 청동거울이 거울면이 주검을 향하도록 하여 곧게 세워진 상태로 껴묻거리 되어 있었다. 완전한 형태의 원형으로 지름 15.9㎝, 두께 0.1~1.2㎝이다. 이 거울은 기원전 1세기경의 초기 철기시대 경주 조양동 38호 무덤에서 처음 출토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가상귀부”명 거울로 알려졌다. 이러한 거울이 청주의 고려시대 무덤에서도 출토되었다.

고려시대에 거울은 화장의 성행으로 중요한 일상생활용구 중 하나였다. 고려도경에 고려인들은 향유(香油) 바르기를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를 즐겨 바르지 않았고, 버드나무 잎같이 가늘고 아름답게 눈썹을 그리며 또한 비단향주머니를 차고 다녔다고 전한다.

거울이 용모를 가다듬는 생활용구로 대중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거울이 무덤에서 동곳, 가위, 빗 등과 함께 출토되며, 청자나 도기로 만든 작은 병(油甁)이나 분합 등과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거울은 주검의 머리 쪽이나 가슴 인근 등 묻힌 사람의 상체부에 해당하는 곳에 껴묻거리되며 머리장식이나 가위 등 일부 유물을 제외하고 공반되는 다른 유물들과 구분되는 공간에 묻는다.

이는 거울이 지니는 주술적인 힘(呪力)으로 귀신과 악령이 주검에 묻지 않도록 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고대부터 거울은 단순한 껴묻거리가 아니라 주술적인 힘이 있는 제의용구로서 주검을 보호하고 나아가 어두운 무덤 안을 밝게 비침으로써 묻힌 사람을 밝은 곳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제의적인 성격에 의해 의도적으로 껴묻기한 행위의 결과물이다.

청주 금천동유적에서 출토된 “가상귀부”명 거울은 제천 왕암동유적, 충주 금릉동 금제유적의 움무덤(土壙墓)에서도 출토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이들 거울은 중국 한경(漢鏡)을 모방하여 고려에서 자체 제작한 방제경(倣製境)이다. 거울은 얼굴을 비추는 화장용구로서 뿐만 아니라 신분상징물, 제의적인 용도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에 무엇을 염원하고 기원하며 거울을 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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