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 (午睡)
오수 (午睡)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0.07.0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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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집 두 채가 있다. 한 채는 꼭대기 집보다 조금 밑에 지었는데. 그 앞으로 오솔길이 있어 꼭대기 집과 연결되었다. 내가 어떻게 그 꼭대기 집에서 사는지는 모르나 오솔길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그때 오솔길의 끝에 있는 아랫집 앞에서 키가 큰 남자와 마주쳤다. 눈은 컸지만, 왠지 퀭했고 코는 높고 컸으며 입은 앙다물고 있어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당황했다기보다 실망스러워 그 자리에 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그 남자는 무슨 이유에선지 내가 알기로는 명망이 높아 평소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방금 전 절벽 위의 아랫집에서 물건을 훔쳐 나오는 길에 나와 마주친 것이었다. 얼마나 억울하고 서러웠는지 한참을 울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을 만큼 생생한 꿈이었다. 장맛비가 내리던 며칠 전, 빗소리가 자장가로 들렸는지 잠깐 오수에 빠졌던 모양이다. 평소에도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그런데 대개는 잠에서 깨고 나면 흐릿해져 잊고 마는 것이 다반사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꿈에서 깨고 나서도 방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마음속에 있던 화가 잦아들지 않았다. 잠에서 깬 후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꿈은 정몽(正夢)이라고 했다. 정몽은 꿈 내용이 실현될 정도로 예언의 꿈이라는데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다. 책보다는 그 책 표지의 남자사진에 넋을 잃고 말았다. 방금 전 꿈속에서 보았던 그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 얼마 전 사다 놓고 읽지 않은 책 표지의 남자다. 읽고 싶어 주문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책더미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그 책을 집어들었다.

사뮈엘 베게트, 그의 이름이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이며 독창적인 작품을 쓰는 작가로 사생활 또한 폐쇄적이어서 베일에 싸인 사람이었다. 그것을 반증하듯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의 생활과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루하기 그지없는 작품이었지만 나는 그날 앉은 자리에서 완독해 버렸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기다림만 있다.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매일 나무 앞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그렇게 `고도를 기다리며'는 어떤 무엇의 `고도'를 기다리는 이야기다.

부조리극이라 일컫는 이 작품은 1952년에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묵직한 작품이다. `고도'는 누구에게나 희망이 되는 마법의 `그 무엇'이다. 1957년 뉴욕의 한 형무소에서 단지 여배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작품이 상영된 적이 있다. 그런데 수감자들로부터 열광적이 반응이 이어졌다. 그 이유는 `고도'가 그들에게는 `자유'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작품은 끝나는 순간까지도 `고도'는 부재(不在)이기도 하고 현존(現存)이기도 하다는 듯 두 주인공을 무대 위에 세워 둔 채 끝난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자신만의 잣대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 만약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게 된다면 지금 우리는 `고도'를 무엇이라고 할까. 연인에겐 사랑이,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겐 합격이, 몸이 아픈 이에겐 건강이듯, 저마다 다른 `고도'를 생각할 터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 우리 모두에게 `고도'는 평범한 일상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오수의 그 꿈이 고맙기만 하다. 절벽은 내 불안한 마음일 터이고, 그곳에서 만난 그(사뮈엘 베게트)는 나를 일깨워 준 나침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한동안 꽤 깊은 내 마음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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