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만약에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0.06.09 18: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자랑이고 싶었다. 친정집 앞마당은 봄만 되면 하얗게 벙근 진달래가 마당을 밝히며 손님들을 맞곤 했다. 그래서 나에게도 자랑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얀 진달래는 친정 엄마가 생전에 좋아했던 나무였고 꽃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해 봄 하얀 진달래 나무는 우리 집으로 옮겨 왔다. 하지만, 실하던 가지들은 하나 둘 말라갔다. 봄이 되면 화사하게 핀 하얀 진달래를 보며 엄마를 생각하려 했다. 무슨 조화 속인지 모르겠다. 엄마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듯 제발 살아나라고 애원했지만 그해 봄 두 가지에서만이 힘겹게 꽃망울을 터트렸다.
힘없이 부러지는 진달래 가지는 엄마의 답일까. 언제나 그랬다. 어머니는 모든 일에 있어서 답을 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싫다는 것인지, 좋다는 것인지 도통 알아낼 수가 없지만, 어머니는 당신의 표정을 보고 내심 맞추라는 투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그토록 듣고 싶었던 답도 어머니는 끝내 하지 않으셨다.
“엄마, 내가 누군지 알아?”
초점도 흐려진 눈동자가 떨리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어머니의 마음 집에 내가 살긴 하는 걸까. 치매가 걸리시고 나서 나는 어머니에게 언제부턴가 “개울 건너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흔들어도 보고 귀에 대고 연신 소리도 질러 본다. 하지만, 대답은 답이 아닌, 욕 몇 마디.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욕이라도 엄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것이. 언제까지 들을 수 있을지 이제는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시고 아버지와 당신의 작은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화단 중앙에 심어 놓은 하얀 진달래는 이제 뾰족한 몸통만 남아 그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내가 하얀 진달래 나무를 친정집 마당에 그냥 두었더라면 어땠을까. 주인 없는 뒷집의 화단과 마당의 나무들이 야생화가 되었다 한들 죽지는 않았지 않았던가. 엄마를 잊지 못해 엄마가 좋아하던 나무를 내 집 마당으로 옮겨놓았지만 결국은 나무만 죽이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순리대로 자연에 맡겼더라면 이렇게 부질없는 후회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뒷마당의 작은 채마밭에 심어 놓은 호박과 오이가 이제 새끼손가락 한마디만큼 컸다. 이때쯤이면 늙으신 어머니가 상추와 부추, 삶은 머윗대를 까만 봉다리에 무겁게 들고 오시고도 남을 때이다. 너무 많다 타박하는 딸의 말에도 며칠 뒤면 또 그렇게 발걸음을 하셨던 어머니다. 세월이 한자리에 머물지 않듯 어머니 또한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을 왜 몰랐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 정신을 놓았을 때도 통장만큼은 손에 꼭 쥐고 계셨던 어머니. 이미 잔고가 바닥이 나 있는 줄도 모르고 그 통장을 잃으면 자식 고생시킬까 안절부절못했던 분이었다. 무수한 물음에도 답이 없던 어머니가 이제야 이해 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점점 나도 어머니의 나이와 모습을 따라가기 때문일까. 껍질도 벗겨진 채 하얀 속살만 남은 앙상한 진달래 나무가 다소곳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제야 알겠느냐는 듯 하얀 꽃을 피워 올리듯 하얗게 웃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