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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5.17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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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가 체게바라를 살해하다(?)
김 승 환 <논설위원·충북시민단체 연대회의 상임대표>

나는 어린 시절 케네디를 존경했다. 미국을 우리의 또 다른 조국이라고 생각했던 때의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케네디가 죽은 1963년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청주시 수동 어느 방에서 럭키 라디오를 듣고 '케네디가 죽었다'라고 놀라셨다. 그가 죽은 것이 교동국민학교 3학년이던 나와 반드시 상관이 있어야 할 것 같았기에 나도 덩달아 막대한 슬픔을 표현하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케네디는 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67년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체게바라가 죽었다. 아버지는 물론 '체게바라가 죽었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아니, 한국의 어느 누구도 그런 발화(發話)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애도의 뜻을 섞어서 '체게바라가 죽었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그를 존경하는 한국인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역적(逆賊) '체게바라가 드디어 죽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체게바라는 한국인에게 공산주의자, 즉 철천지원수와 동급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금기였고 불온이었다. 그가 죽던 날, 체게바라는 양손이 잘린 채 총살형의 형식으로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볼리비아 산중에서 울렸을 단말마의 비명! 탕, 탕, 탕탕탕. "겁쟁이들" 또는 "죽여라"라고 외치던 그는 역사의 신화(神話)로 사라졌다. 국민학교 학생이던 나는 그가 죽은 줄도 모르고 아직도 케네디가 죽어서 세상이 잘못되어가는 것으로만 염려하고 있었던 어리석은 아이였다. 머지않아서 체게바라는 체체체로 부활했다. 68혁명 당시 파리나 로마 또는 뮌헨의 시위대는 체체체를 연호했다. 그의 정신, 그의 사상, 그의 인간애가 유럽을 강타했던 것이다. 그렇게 체게바라가 부활할 때도 여전히 나는 미국이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고마운 나라이고 인간을 존중하는 국가라고 믿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체게바라 서거 40주년인 2007년, 그는 약자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과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한 용기 등 여러 면에서 성자(聖者)를 닮았다고 추앙받고 있다. 마침내 체게바라라 산업까지 등장하여 자본이 다시 한 번 체게바라를 부활시키는 놀라운 일도 벌어졌다.

실제로 체게바라를 죽인 것은 볼리비아 정부군이다. 하지만 체게바라를 죽도록 만든 것은 미국 CIA였다. 미국으로서는 남미의 사회주의 혁명 괴수(魁首)를 처단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전이었을 것이다. 체게바라는 자본에 저항했고, 미국과 싸웠기 때문이다. 미국과 싸움을 하면서 체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자본주의, 서구합리주의, 패권주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와의 긴긴 장정(長程)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까지는 수염쟁이 카스트로 또한 우리에게는 악마의 동생쯤으로 각인되어서 그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수염쟁이 카스트로 역시 훗날 세계사의 신화가 될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이는 오늘은 2007년 5월 17일.

체게바라의 죽음에 CIA가 개입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미국은 남미 국가들을 조정하고 탄압하면서 미국 패권주의를 강화했다. 그런데 CIA가 그런 활동을 하도록 인정한 대통령이 케네디였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을 '케네디가 체게바라를 죽였는가'와 같은 의문의 은유를 썼다. 물론 케네디가 체게바라를 죽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철없는 시절에 내가 존경했던 케네디가 철난 시절의 내가 사랑하는 체게바라와 같은 혁명가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에 참담한 낭패감을 맛보았다. 결국 미국과 자본은 체게바라를 죽임으로써 혁명과 인간을 살해한 것이다. 체게바라의 국적은 그가 태어난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수염쟁이 카스트로의 나라 쿠바다. 혁명을 찾아서 국적을 바꾸기도 했던 비운의, 동시에 행운의 체게바라. 의사로 살아도 될 인생을 직업혁명가로 살았던 그의 운명에 한 줄기 성호를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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