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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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5.1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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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관한 단상(斷想)
정 규 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전 언론인>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 메조소프라노 아그네스 발차(Agnes Balta)가 부른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원제 To treno fevgl stis okto)'는 몇 해 전 드라마 '백야'에 삽입되면서 우리에게도 선율이 익숙한 노래다.

세계 음악계의 거장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작곡한 이 노래엔 레지스탕스인 애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애틋한 여심(女心)이 그려져 있다.

이 노래가 신록의 계절 5월에 새삼스러운 것은 동족상잔의 내전과 나치 독일의 침략, 미국과 영국의 내정간섭, 군부 쿠데타, 군사독재 등 그리스의 20세기가 한국의 시대적 상황과 흡사한데서 비롯된다.

카테리나를 향해 떠난 혁명가 연인을 기다리는 슬픈 사랑의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우리의 5월, 광주와 그 쓰린 기억이 맞닿아 있다.

이 노래는 결코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은 '기억'이라는 순결함으로 남아있다.

"기억이란 시간과 함께 엷어지게 되어 있지. 시간이란 그런 것이니까. 누구도 과거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소설가 신경숙은 1999년에 발표한 작품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서 '기억'을 이렇게 정의한다.

"기억을 저버린 채 세상은 변하지 않고 돌아간다. 달콤한 잠에 빠졌다가도 빗소리나 고독한 건물의 그림자 같은 것에 잠이 깨면 어김없이 중얼거리곤 했지.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라고 절규하는 이 소설은 방송국 성우 김하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잃어버린 사랑의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이 소설의 제목은 주인공이 바로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기차는 7시에 떠나네'로 바꿔 신청하면서 한 남자를 기다렸다는 유사성에서 과거가 서로 상통한다. 게다가 '야학'과 노동운동 등 사회 부조리에 대한 관심과 혁명성에서도 서로 닮은 꼴이다.

이처럼 사회현상에 내포된 문화의 동질성은 신경숙의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와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의 유사한 모티브와도 연결고리가 있다.

이들 세 작품들은 소리를 매개로 한다.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애잔한 기타의 선율이, 소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는 주인공의 직업이 성우라는 점, 그리고 영화 '봄날은 간다' 역시 주인공들이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 겸 프로듀서(은수 이영애 분)와 사운드 엔지니어(상우 유지태 분)라는 점에서 서로의 유사성을 유지하고 있다.

마침내 남과 북의 끊어졌던 철로가 열리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를 등에 짊어진 채 침묵의 형상으로만 남아있던 기차가 휴전선을 넘나들게 됐다.

"외로웠는가 잊으려고 하지 말아라. 생각을 많이 하렴. 아픈 일일수록 그렇게 해야 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잊을 수도 없지. 무슨 일이든 바닥이 있지 않겠니. 언젠가는 발이 거기에 닿겠지. 그때, 탁 차고 솟아오르는 거야"라는 신경숙의 주문은 남과 북, 그 엄청난 견고함을 무너뜨리는 희망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드디어 힘찬 쇠바퀴가 구르는 엄청난 소리는 이데올로기의 편가름으로 잊혀졌던 한민족이라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박동이 될 것이다.

비록 순결했던 5월 광주의 피울음이 대선을 앞둔 주자들이 앞다투어 찾는 선거판의 추악한 단면으로 변질되고 있으나, 그 속에 엄연히 살아있는 숨결의 소리는 여전히 희망으로 기억돼야 한다.

그리하여 광주에서 개성으로, 그리고 또 개성에서 광주로 이어지는 동질성의 회복과 일맥상통함이 새로운 문화로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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