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5.16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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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
한 신 구(교사)

어릴적 우리 학교 운동장은 바다만큼 컸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었고, 운동장가에서 삐거덕거리며 그네를 타는 아이들은 까마득하니 콩알만했다. 학교 가는 길엔 더 멀었다. 뒷산 언덕을 헉헉 올라갔다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비탈길을 뛰어 내려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가려면 왜 그리 운동장은 크고 하얀지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큰 운동장은 아무래도 운동회가 있어 가장 신났다. 눈부시게 높고 푸른 하늘에 만국기가 펄럭이고, 4박자 행진곡이 온 마을에 왕왕 울려 퍼지는 운동회 날 아침에는 두 발이 번쩍번쩍 올라가 어느새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청백 머리띠를 다시 한 번 잡아매고 조회대부터 나무를 세어 우리 반 자리에 미리 서보기도 하며 트랙 선에 하얀 횟가루를 뿌리는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운동회마다 매번 꼴찌를 하면서도 이번 만큼은 등수 안에 들어 기어이 상을 타고야 말겠다고 두 발에 힘을 주어 연습도 하였다. 모처럼 바쁜 일손을 놓고 오셔서 운동장을 가득 메운 어른들의 아낌없는 격려를 받으며, 우리들은 운동회 준비를 하느라 검게 그을린 모습으로 고전무용, 기마전, 고적대 행진 등을 정성을 다하여 보여 드렸다. 큰 공 굴리기, 점심시간을 알리는 바구니 터뜨리기, 목이 쉬도록 소리치며 응원하던 청백 계주가 끝나고, 우리 편이 이기기라도 하면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던 그 기쁨에 목청껏 만세를 부르던 추억은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 출렁거린다.

며칠 전 우리도 운동회를 하였다. 옛날에 비하면 먹을 것, 입을 것이 넉넉하고 볼 것도 많은 시절이라 그전처럼 동네 축제는 못되더라도 선후배가 어울려 정정당당하게 승패를 가리고 인내와 협동을 배우는 운동회는 아이들에게 산교육의 장이고 호연지기의 최초 시공이 된다.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빛나는 태양과 푸르른 나무들을 보며 연습을 하고 영차, 영차 발맞추어 운동장 가운데로 출전하는 작은 용사들의 가슴은 콩닥콩닥 기대와 용기로 가슴 벅차고 신난다. 학교와 학원, 학습지로 어른들보다 더 바쁜 요즈음의 아이들은 비가 와서 연습을 못하게 되는 날엔 아침부터 시무룩하다.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함께 어울려 뛰어놀 기회를 놓쳐버려 아까워한다.

오전 일과로 바쁘던 아이들에게 모처럼 찾아 온 점심시간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나 손바닥만 해진 운동장은 늘 초만원이다. 전교생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공 한 번 마음껏 뻥 차지 못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아쉬움만 안고 교실로 들어오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더구나 어린 아이들은 형들에게 밀려 교사 뒤편 구석이나 운동장한쪽에서 놀이기구나 타며 감질나게 놀다가 하교 후를 약속하며 교실로 들어온다.

신나게 뛰어 노는 것만으로도 풀어버릴 수 있는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해가 갈수록 산만해지고 거칠어진다. 옛날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는데도 아이들의 학습력은 점점 떨어지고, 생각이 단순해지며, 성취욕과 인내심이 상실되어 간다. 뛰어놀 여가도 없이 이리저리 시달리는 아이들은 짧은 글 쓰기 시간에 죽으면 참 편할거라며 내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지난날 보릿고개까지 넘으면서도 아버지들은 우리의 운동장을 빼앗지 않으셨다. 당신들은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자식들은 배부르고 등 따시게 잘 살아야 한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용기와 사랑을 주셨다. 미래에 대한 소망 대신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야 하는 각박하고 답답한 현실은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조차 경제논리로 축소해 버렸다. 체격은 커지는데 체력이 저하된다고, 어릴 때 맘껏 뛰어놀아야 창의성이 길러지고 평생 안고 갈 심신이 건강하다고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공부가 끝나면 가방을 휙 던져놓고 공차기, 그네타기, 공기놀이로 해 지는 줄 모르던 어릴적 우리의 운동장과 참된 휴식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찾아주고 싶다. 걱정 근심을 하늘로 날려 보내고 친구들과 즐겁게 뛰어 놀며 우정과 꿈을 길러, 어렵고 힘들 때마다 지나간 어린 시절을 미소로 뒤돌아보며,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간직한 채 행복과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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