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
잠시 멈춤
  • 김금란 기자
  • 승인 2020.03.11 1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김금란 부국장
김금란 부국장

 

일상이 멈췄다.

늘상 주고받던 “굿모닝”,“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말도 들어본 지 오래다.

대신 “밤새 별고없지?”,“집안은 모두 별고없지?”라는 말을 듣는다.

생소하고 낯선 별고(別故·특별한 사고)란 단어가 요즘처럼 자주 등장한 적이 없다.

석 달 전까지만 해도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논하고, 인공지능(AI) 교육을 강화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지금은 왁자지껄 아이들 소리로 가득 차야 할 학교는 문이 닫혔고, 개강을 연기한 대학 캠퍼스는 썰렁하다.

코로나19 탓에 2020년 3월 봄의 시계는 멈췄다.

밤새 안녕이라고 50여 일째 우리는 코로나19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1일 확진자 7755명, 사망자 60명, 검사진행 1만 8540명이라는 발표를 듣다가 잠시 숨을 멈춘다. 그리곤 두리번거린다. 혹시 저 사람인가. 지나가는 행인들 낯빛을 살핀다. 안 하던 짓이다.

매일 마스크 쟁취 전을 벌이는 지인은 마스크를 손에 쥔 날 며칠 동안은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마구 뛰었단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더니 올해는 전쟁 같은 봄을 보내고 있다.

마스크가 목숨 줄이 된 지금, 정부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잠시 멈춤' 운동을 권장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를 두기 위해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을 멈춰야 한다. 만나더라도 2미터 이상 떨어져 대화를 해야 하고, 소통은 전화, 인터넷, SNS로 해야 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우리는 지금과 또 다른 사회적 거리를 두고 살았다.

나홀로 즐기는 삶이 사회적 추세로 자리 잡으면서 혼밥(혼자 밥먹기), 혼술(혼자 술먹기), 혼영(혼자 영화보기), 혼행(혼자 여행하기), 혼명(혼자 명절보내기) 등이 유행했다. 구태여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었다. 휴대전화만 있으면 쇼핑하고, 음악 듣고, 책을 읽고, 은행업무도 보고, 낯선 친구와 대화도 나눈다.

나를 위해 타인과의 거리 두기를 스스로 선택했었다면 지금은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타의에 의한 사회적 거리를 둬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사회적 거리는 2미터를 유지해도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의 거리는 벌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위기의 순간 얼굴없는 기부천사들이 등장했고 어김없이 코로나19 한파를 녹이고 있다.

최근 충주시 연수동 행정복지센터에 70대 할머니가 찾아와 현금 200만원이 든 봉투를 놓고 갔다. 기부금 처리도 원치 않았던 할머니는 직원에게 “나라에 신세를 많이 졌고 도와주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또 다른 40대 여성은 “코로나19로 홀로 사는 어르신들이 힘든 것 같은데 전기장판 등 물품을 사서 건넸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150만원을 주고 사라졌다. 강원 화천의 한 주민은 화천경찰서 사내파출소 입구에 “반드시 끝은 옵니다. 그리고 행복도 옵니다. ”라는 편지와 함께 100만원을 놓고 갔다.

정치인들은 오늘도 외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얼마나 힘드십니까? 국민 여러분의 고통과 불안을 충분히 이해합니다.”라고. 국민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약국이나 마트로 가서 마스크 대열에 합류해 몇 시간 줄 서보면 된다. `마스크 없음'안내문을 보고 주저앉는 서민의 표정만 봐도 느낀다. 바이러스도 진화하는 데 서민 정책을 펼치겠다며 재래시장을 찾고 세금 퍼주는 포퓰리즘 공약을 앞세우는 정치인들의 멈춘 생각은 언제쯤 변할지 궁금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