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백제의 역사를 알게 하는 청주 봉명동 유적
초기 백제의 역사를 알게 하는 청주 봉명동 유적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20.02.2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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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청주는 무심천과 미호천이라는 비교적 너른 강을 중심으로 일찍이 인류의 생존이 이루어지고, 문화적인 발전도 진행되고 있었다. 청원 두루봉 동굴의 구석기인들과 옥산 소로리의 신석기인들이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약 3,000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는 무심천과 미호천의 지류인 작은 개울들과 넓은 들판을 터전으로 하여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은 흥덕경찰서를 비롯하여 공단과 테크노폴리스 등 한쪽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지만 청주 무심천의 서북쪽 봉명동의 넓은 구릉지대에도 청동기시대 마을이 있었다. 37채에 이르는 가옥이 무리를 지어 살았던 이 마을은 길이 3~7m, 너비 2~6m 정도의 네모꼴 집터와 함께 지름이 3~6m 정도의 둥근 집터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을 봉명동 유적이라 부른다. 이 유적은 둥글거나 모서리를 죽인 네모꼴의 집터에, 움 바닥 가운데 두 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타원형 구덩이를 갖춘 집터인데, 이를 청동기 시대 전형적인 유적으로 흔히`송국리형 집터'라 부른다.

송국리형 집터 사람들은 겹아가리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청동기 시대 중기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봉명동 청동기시대 마을은 네모 집터 사람들에 이어 새로운 문화를 가진 둥근 집터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송국리형 집터를 만들며 살았던 사람들은 논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알려져있다. 봉명동 집터의 주변에서는 논과 밭 등 당시의 농경지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봉명동 사람들도 반달돌칼, 돌살촉, 갈판 등 농경생활과 관련된 도구 등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봉명동 유적이 주목을 받는 것은 2~3세기 마한의 정치세력과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어 백제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청주 송절동 유적과 연결된 이 유적에서 주목할 부분은 널무덤이 대부분이며, 합장묘도 발굴되었다는 점이다. 대략 3세기 후반에서 4세기에 만들어진 고분군은 금강 상류지역의 역사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말 모양의 허리띠장식과 `대길(大吉)`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 방울이 함께 발견되어 이 지역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관직에 관한 자료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아울러 인근의 초기 백제 전사자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신봉동 고분군(사적 319호)과의 연관성을 통해 초기 백제와 청주의 역사와 문화를 확인하는 귀한 유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큰 강을 끼고 발달하였다. 금강의 지류인 무심천과 미호천이 유유히 흐르는 청주는 수천 년 전부터 이처럼 삶의 터전으로 청주를 개척하고 살아갔던 것이다. 지금의 흥덕구와 상당구로 크게 나뉘어진 청주는 수천 년 전부터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청주테크노폴리스가 들어서고 첨단 과학의 바탕인 반도체를 비롯하여 첨단 산업의 중심지인 청주 봉명동 지역이 매캐한 공기만이 흐르는 삭막한 공업단지가 아니라 된장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조상의 삶의 지혜가 가득한 역사와 문화의 도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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