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서사림(湖西士林)의 뿌리, 보은 고봉정(報恩 孤峰亭)
호서사림(湖西士林)의 뿌리, 보은 고봉정(報恩 孤峰亭)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20.02.2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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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보은은 땅이 매우 메마르다. 오직 관대(館垈)만은 속리산의 남쪽과 증항(甑項)의 서편에 위치하여 들이 넓고 기름지니 살 만한 곳이다.”고 하여 `관대(館垈)'가 보은지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았다. 이 관대(館垈)가 지금의 마로면 관기리이다.

관기는 예부터 경북 상주에서 화령(化嶺)을 넘어와 관기-보은-창리-미원-초정-청안-진천-광혜원으로 가는, 영남지역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관기라는 지명도 교통로상의 중요한 숙박시설이었던 왕래원(王來院)이라는 관(館)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관기리는 한때 `왕(王)이 왔다(來)'고 해 `왕래재'란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361년 홍건적이 쳐들어와 개경이 함락되자,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돌아가는 길에 30일간 이곳에서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행정지명이 `왕래면(旺來面)'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현재의 마로면(馬老面)으로 변경되었다.

고봉정(孤峰亭)은 마로면 관기리에서 청산방면으로 가는 길옆 고봉(孤峰)이라는 작은 동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작은 산봉우리가 솟아 있고, 그 주변에는 보청천, 삼가천, 적암천의 세 줄기 냇물이 주위에서 합수(合水)하는 지점이어서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처음 충암(沖菴) 김정(淨, 1486~1520)이 공부할 때 자주 찾아가서 경관을 감상하면서 이곳을 `고봉(孤峰)'이라 하였고, 나중에 자기의 호로 삼기도 하였다.

고봉정(孤峰亭)은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城, 1487~1521)이 기묘사화로 이곳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이다. 최수성은 고향이 강릉으로, 시문·서화·음률·수학에 뛰어났다. 그는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사임당은 그의 5촌 조카이다. 신진 사림파 학자로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교유하였으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친구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술과 여행을 즐겼다.

그는 방랑하는 과정에서 절친한 친구 김정(金淨)이 살았던 보은에 우거(寓居)했고, 그런 연유로 원정리(猿汀里)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그의 은거생활은 길지 못했다. 중종 16년(1521) 신사무옥(辛巳誣獄)에 관련되어 처형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정(金淨) 등과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던 병암(屛菴) 구수복(具壽福·1491~1535)도 기묘사화 이후 이곳에 은거한 뒤, 자주 찾아와 학문을 연마하였다. 구수복은 이조좌랑에 재직 중 기묘사화에 휘말려 파직되었으나 1533년(중종 28) 복직되어 구례현감으로 재직 중에 죽었는데 후에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 뒤 정자가 퇴락하자 구수복(具壽福)의 5세손인 구봉우(具鳳羽, 1612~1681)가 봉우리 아래로 옮겨 지금의 고봉정사(孤峰精舍)를 세웠다 한다.

현재 고봉정은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모임지붕 건물이다. 원래 고봉정(孤峰亭)이 있었던 고봉(孤峰) 정상에 2009년 복원하였다.

조선전기 보은지역은 김정(金淨)을 비롯하여 많은 처사형 선비들이 사화를 피해 은거하며 교류하였다. 그들은 향촌사회를 이끌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그 덕분에 보은지역은 일찍 성리학이 뿌리내리고 호서지방 최초로 상현서원이 건립되었을 뿐 아니라 이상수(李象秀), 박문호(朴文鎬)로 이어지는 충북지역 마지막 성리학의 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특히, 고봉정(孤峰亭)은 기묘사화로 벼슬을 버리고 보은으로 내려와 은거한 김정(金淨), 최수성(崔壽城), 구수복(具壽福)이 교분을 나누었던 자취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으로,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의 형성에 싹이 트게 되는 역사적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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