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만찬
여의도 만찬
  • 이재경 기자
  • 승인 2019.12.2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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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주장
이재경 국장(천안)

지난 18일자 충청타임즈 1면에 보도된 `송년 모임 건전한 변화, 시름 깊은 소상공인들'이란 제하의 기사는 연말을 맞아 전혀 특수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지역 음식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금융기관의 직원들이 송년 모임을 `연탄 나눔'과 사회복지시설에 성금을 내는 것으로 대체했다는 사례가 이를 잘 말해 준다. 보도에 따르면 또다른 금융기관은 아예 송년회식을 생략하고 볼링장에서 직원들이 단합대회를 열기도 했다. 또다른 회사는 송년 회식 대신 단체 공연 관람을 선택했다. 회사 내 젊은 직원들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아예 송년 모임을 점심 식사 모임으로 대체하는 곳도 부쩍 늘었다. 예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대낮 송년회'를 이젠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공직 사회에서도 연말 송년회가 사라지고 있다. 역시 `워라벨'을 즐기려는 젊은 직원들이 주도하고 있다. 극장을 가거나 문화 생활을 함께 하는 방식으로 술냄새 없는 송년회를 하는 곳들이 많다. 실제 대전 서구보건소는 지난 20일 직원 50여명이 퇴근 후 함께 극장에서 만나 영화를 보면서 송년 모임을 가졌다. 식당은 아예 가지 않고 미리 준비한 김밥으로 저녁을 먹으며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보면서 한해를 동료들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천안의 한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50대 B씨는 “이제 관청에서 송년회 술자리 문화는 50대 이상 나이 먹은 사람들이나 끼리끼리 모여 하는 것으로 알면 된다”며 “부서에서 전 직원이 술을 함께 하며 회식을 하는 것은 평소에도 보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식당들은 울상이다. 천안에서 20년째 음식점을 운영하는 김성열씨는 “지난해 연말에도 단체 회식 손님들이 줄어 힘들었는데 올해는 더 힘들다”며 “재작년을 기준으로 단체 회식 예약 건수가 10건이었다면 지난해는 6건, 올해는 2건 정도로 1/3이나 줄어든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청주에서 30년째 식당을 경영하는 A씨는 “수년전까지만 해도 회사, 공무원들의 연말 단체 회식 예약이 줄을 이었는데 이젠 아예 그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다”며 “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사정은 식당들 뿐만이 아니다. 음주 운전 처벌 강화와 `출근 시간 음주 단속' 등의 여파로 가뜩이나 위축된 노래방을 비롯한 유흥주점 업계엔 찬바람만 불고 있다.

택시와 대리운전 업계도 세밑 한파를 톡톡히 겪고 있다. 저녁 회식과 술자리가 없어지면서 역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20년간 개인택시 영업을 해 온 C씨는 “불과 몇 년전만해도 연말 즈음엔 2, 3차 장소로 술자리를 옮기는 손님들을 많이 태웠는데 이젠 그런 손님을 찾아 볼 수 없다”며 “늦게 까지 있어 봤자 손님이 없어 요즘은 자정 이전에 집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지난 19일 산하 기관장들과 서울의 한 식당에서 송년 만찬회를 했다. 12개 산하 기관장과 만나 올해 노고를 격려하고 내년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만찬 장소가 서울의 한 복판, 정치·금융 권력의 중심지인 여의도다. 쉬 모일 수 있는 장소여서 그곳이 선택된 것이겠지만 이왕이면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통시장이나 골목 상권의 식당이었으면 어땠을까. 화기애애하게 진행된 만찬장에서 박 장관의 노래 실력이 화제가 됐다는 얘기까지 들리니 더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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