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곳에서 그리움을 줍다
비워진 곳에서 그리움을 줍다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9.12.1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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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수필가

 

한 줄금 바람이 인다. 찬바람이 성큼 내려앉은 산사, 흙바람을 일으키며 뜰 안을 쓸어가고 울담 아래로 자박자박 뒹군 낙엽들이 쌓인다. 간간이 울리는 청아한 울림, 풍경소리는 처마 끝을 타고 대웅전용마루 청기와에 머물다 흩어진다. 또다시 바람이 인다. 갑사 경내를 훑고 품에 안긴다. 용마루청기와, 왕실의 어른이나 왕이 행차한 사찰에 표식으로 청기와를 한두 점씩 내려주곤 하셨는데, 사찰에서는 대웅전용마루에 얹어 표식했다. 이곳 대웅전용마루에도 청기와가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다.

청기와는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옛날 와공(瓦工)이 기와를 만든 후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특수한 재료를 이용하여 청색이 나도록 했다. 하지만 일반기와에 비해 웅장하고 화려한 청기와는 대여섯 배나 제작비용이 들기 때문에 일반가정에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때문에 권위의 상징인 왕실 이외에 사용할 수도 없었다고 실록에 전해진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물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니, 당연 귀한 대접을 받은 청기와는 왕실에서 다녀간 사찰에 하사하심을 영광스럽게 받으셨고 표식으로 사찰에서는 대웅전용마루에 얹은 것이다.

고즈넉한 갑사, 기와지붕을 가만가만 훑어보면 희끗희끗 퇴색된 것이 오래된 역사도 말하지만, 고향처럼 푸근하게 안긴다. 갑사를 둘러싼 담장기와를 보면 수키와를 덮을 정도로 널찍하게 핀 와초가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면서 세월을 껴안고 있다. 그렇게 기와는 몸으로 세월을 기억하고 있었다. 담장 또한 화사한 꽃무늬 막새기와를 사용하지 않고 수키와 끝에 흰색의 아귀토를 발라 부드러움을 더해 절로 발길을 잡는다.

신비로움을 간직한 기와, 와초가 핀 기왓장을 거둬 자리를 옮기면 이상하리만큼 와초가 말라죽는다 한다. 와공의 혼이 깃들여서일까? 단지 지붕에서 바닥으로 내려왔을 뿐인데도 금세 버썩버썩 시든다. 가끔씩 물을 주어야 와초가 산다고 하는 걸 보면 분명 기와는 한옥과 숨을 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본시 기와는 건축의 멋, 와장(瓦匠)의 예술혼이 깃들여 있다. 옛날 양반가의 집을 보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라 했다.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진 기와집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예술이다. 하여 지붕에 얹히기까지 기와에 스민 와장의 혼, 대가야박물관에서는 기와를 두고 `지붕 위에 핀 예술'이라 표현을 했다.

사람과 자연을 품은 기와지붕, 지붕이 기둥보다 바깥쪽으로 더 나와 계절에 따라 변하는 햇빛의 각도를 이용하여 여름에는 햇빛이 적게 들게 하고 겨울에는 많이 들게 한다.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처마, 무지개를 닮은 곡선 그 위에 수키와와 암키와 그리고 화려한 무늬의 망와는 기와의 또 다른 매력이다.

뿐인가 기와 골 끝에 핀 수막새의 다양한 연꽃무늬, 마치 다식판 문양과 흡사하다. 기억 끝에 잊혀가고 서서히 문명에서 멀어져가는 다식판, 그 문양도 회화적이고 설명적인 무늬보다는 추상적이다. 수막새의 연화문, 동물, 도깨비 문양이나 다식판의 꽃과 추상적인 동물로 선조들은 점잖고 깊이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염원이 담긴 문양을 만들었다. 기와의 얼굴무늬 수막새 흔히 신라 천 년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무늬수막새 그리고 다양한 연꽃이나 짐승의 얼굴들, 액운을 막아주면서 예술과 염원이 담긴 막새가 가치를 더한다.

기와 그리고 흙벽돌, 우리의 건축임에도 하늘 높이 치솟은 럭셔리하고 세련된 서양건축물 속에 기거하면서 우리 건축을 그리워하는 우리들. 그립다. 산사의 풍광에 물들고 겨울에 물들면서 가슴속을 파고드는 그리움, 그리움이 허기질 때면 옛길을 걷는다. 오늘도 화첩에 비밀스런 나만의 공간을 만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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