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덕사( 淸德 )에서 진안대군의 맑고 푸른 덕을 그리며
청덕사( 淸德 )에서 진안대군의 맑고 푸른 덕을 그리며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07.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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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속리산은 언제나 속세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훌쩍 떠날 것을 손짓하는 큰 산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혼란스런 시절에는 속세를 떠나 속리산으로 가고 싶다.

속리산 꼭대기에 떨어진 빗방울이 남쪽으로 흐르면 경상도 땅을 적시는 낙동강이 되어 남해로 가고, 북쪽으로 흐르면 충청도 땅을 적시며 남한강이 되어 서해로 들어간다.

북쪽으로 떨어진 속리산의 맑은 물은 지금도 유유히 흘러 서해로 간다. 남한강의 상류인 괴강가 한적한 시골 불정면 목도리 마을에 예사롭지 않은 정자가 우뚝 서 있다.

괴산군 불정면 한불로 청덕1길 37에 위치한 청덕사는 태조 이성계의 첫째 아들인 진안대군 이방우와 대군의 첫째 아들인 봉령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방우(?~1393)는 부친이 혁명의 뜻이 있음을 알고 아버지를 떠나 해주에 은거하다 죽은 후 진안대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순조 31년(1831)에 세운 청덕사는 대군이 `청빈하고 덕이 있다.'라고 하여 붙인 것으로 청덕사라고 쓴 현판을 솟을삼문에 걸었다. 솟을삼문 둘레로는 담장을 두르고 외삼문 안에는 연못을 조성했다. 건물 구조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이성계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는 태조 이성계와 안변 한씨 사이의 장남으로 함경도 화령군 영흥면 흑석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해 예의판서와 밀직부사를 지냈으며 부인은 삼한국대부인 충주 지씨이다. 어쩌면 이곳에 진안대군의 사당이 있는 것은 처가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고려 우왕 14년(1388년)에 아버지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처자를 데리고 철원 보개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아버지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것에 반대하고, 오히려 혁명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면서 지냈다고 한다.

조선 태조 1년(1392년)에 여러 왕자를 군으로 봉할 때 진안군(鎭安君)에 책봉됐으며 1년 후인 태조 2년(1393년) 음력 12월 13일 향년 4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진안대군의 죽음의 원인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진안군은 성질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많이 마시는 것으로써 일을 삼더니,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졸하였다'고 적고 있다. 대군이 세상을 떠난 지 7년 되던 해인 조선 정종 2년(1400년)에 진안대군으로 진봉됐다.

정조 13년(1789년) 정조가 지은 진안대군 이방우 묘비문에는 `어려서 태조를 섬길 때 효자로 칭송받았고, 형제 사이에도 우애가 돈독했으며, 점점 자라면서는 시서에 마음을 쓰고 검약을 실천하면서 부귀영화 따위에는 마음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청덕사에 올라 멀리 흐르는 달천강을 바라보면 그 어떤 이념과 사상, 당위성보다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중요하다는 `청덕'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조선을 얻고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 이성계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떨어져 어느 쪽으로 흐르는가에 따라 낙동강이 되기도, 한강이 되기도 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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