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자무수 3
호자무수 3
  •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 승인 2019.07.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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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발우 씻고 향 사르는 그 밖의 인간의 일들은 전혀 모르네.

생각하면 스님이 머무르시는 그곳에는 살랑이며 부는 바람이 시원하네.



반갑습니다. 무문관 공안으로 보는 자유로운 선(禪)의 세계로 여러분과 함께하는 괴산 청천면 지경리 청운사 여여선원 무각입니다. 제가 상주하고 있는 산골 초암에는 주황빛 능소화가 밝은 태양 볕에 그 빛깔이 더욱 곱게 피어나고 있네요. 이 시간에는 무문관 제4칙 호자무수(胡子無鬚) 중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문관의 네 번째 관문에서 달마가 수염을 깎이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인데요. 네 번째 관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혹암(或庵·1108~1179)선사는 우리에게 뚫기 힘든 화두를 던졌습니다. “서쪽에서 온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라고 말이지요. 이렇게 부드럽게 번역은 했지만 사실 혹암선사의 화두에 등장하는 번역을 자세히 보면 “서쪽에서 온 달마”의 원문에는 서천호자(西天胡子)라고 되어 있으니 직역을 하자면 서쪽에서 온 오랑캐 놈이라 한 겁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혹암선사가 대놓고 달마에 덧씌워져 있는 성인의 아이콘인 이 아우라를 벗기려고 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혹암선사에게 달마는 선종의 초조(初祖)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그저 과거 서역에서 온 외국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흑암 선사는 “달마는 무슨 이유로 수염이 없는가?”라고 물으며 폭풍우처럼 닦달하며 몰아붙이기까지 합니다. 어떤 달마도를 보든지 간에 그림 속의 달마는 짙고 풍성한 수염을 자랑하는데 혹암선사는 지금 “달마에게는 수염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심지어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기까지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달마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요. 여기서 혹암선사는 맹목적인 집착을 와해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식은 아주 단순합니다. `A는 B다.'라는 생각의 틀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A는 B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던진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더 들이대게 되면 집착을 붕괴시키는 데는 이보다 더 강력한 약은 아마 없을 건데요. 마치 `A는 B가 아니다'는 사실이 자명한 것처럼 `A는 무슨 이유로 B가 아닌가?'라고 되물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A에 대한 믿음은 유보하고 A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짜 A가 B인지 아니면 왜 B가 아닌지 그 이유를 살펴보아야만 된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당신의 아들은 무슨 이유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가?”라고 물었을 때 만약 아들이 당연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부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질문이 되어 부모는 아들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는 “당신의 애인은 무슨 이유로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항상 진실한 사이라고 믿고 있던 사람에게 정말 충격적인 질문이겠지만 이런 식의 질문으로 인해 두 사람은 서로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욱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무문관 제4칙 호자무수 공안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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