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 오랜 날 시간
일상생활 - 오랜 날 시간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산업팀장
  • 승인 2019.07.09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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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산업팀장

 

라면박스보다 조금 더 큰 상자를 봉한 테이프 중간 부분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댄다. 상자 윗면을 열어젖히자 또 하나의 상자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일반 커터칼 대신 페이퍼나이프다. 혹시나 상처가 날까 봐 선택한 도구다.
두 번째 상자를 개봉하는 순간 반투명 비닐 뒤로 월넛색의 나이테를 가장한 상판이 보이고 상판을 단 물체를 스티로폼이 경호하듯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그 어떤 충격에도 버틸만한 태세다.
이윽고 상자를 벗어나 모습을 드러낸다. 나뭇결무늬를 기본으로 앤틱감성의 패브릭이 눈에 들어온다. 원하던 만큼의 퀄리티를 가진 턴테이블은 아니지만 그동안 묵혀 놓았던 바람을 실현해 볼 수 있는 LP 턴테이블이다.
한 달에 한 번 손바닥만 한 월급봉투와 비닐에 싸인 커다란 정사각의 종이를 들고 들어오시던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월급봉투보다 정사각의 종이에 들어 있는 도넛 모양의 까만 판에 관심을 두었다. 간혹 아버지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노래를 모은 판을 덤으로 내게 사다 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까만 판을 정성스럽게 닦아 중앙에 올려놓고는 온 가족을 불러 모았다. 바늘이 골을 타면서 들려주는 소리는 너무나 신기했다. 가끔 잘사는 친구네로 텔레비전을 보러 가던 때여서 우리 집 라디오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인공의 소리를 내는 장치였다.
사실 노래보다는 이번엔 어떤 가수의 앨범일까 하는 궁금증이 컸다. 온 가족이 전축 판을 사온 날이면 옹기종기 모여앉아 삶은 계란을 까먹는 특별한 날이어서 더 기대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모은 전축 판을 고스란히 내가 물려받았다. 물려는 받았지만 재생기가 없어 여태 틀지 못하고 거실에 장식하듯 꽂아놓았다. 언젠가는 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시간을 거슬렀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졌던 터였다.
전원을 넣고 뉴에이지 음반과 클래식 음반을 차례로 올려놓고 바늘을 옮겨 거치기를 반복했다. 치직치직 거리며 테이블은 돌았고, 다소 가라앉은 듯한 소리와 턴테이블의 외관을 바라보며 나름 운치를 만끽했다.
작은딸은 옆에서 친구가 갖고 싶었던 거라면서 연신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전송하며 함께 분위기를 즐겼다. 아빠가 모은 앨범을 들으며 아이는 마냥 즐거워했다. 그리고 아빠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피아노를 쳐주었다. 아이들이 와야 피아노는 소리를 낸다. 피아노 소리는 곧 아이들이 아빠의 곁에 왔다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 살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이지만 열심히 모아 조립식 프라모델을 구입해 하루 종일 자르고 접착해가며 조립했다. 그렇게 만든 군함, 항공모함, 그리스?로마군선, 헬리콥터, 탱크, 오토바이, 비행기는 함께 쓰는 공간에서 내 공간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였다.
나만의 범선을 만들어보겠다고 몇 날 며칠 쓰레기통을 뒤졌다. 아이스깨끼 막대를 접착시켜 배를 만들고 천을 잘라 밥풀을 으깨어 돛을 만들고, 나뭇조각을 주워다 도르래를 만들어 실을 걸었다. 몇 달을 고생해 만든 배는 발명왕 대회에 출품해 큰상까지 받았다. 발명품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늘어나는 살림살이는 여럿이 사는 좁은 집에 마땅히 보관할 때가 없어 늘 엄마의 표적이 되었다.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 자리를 차지한다는 이유에서다. 아무리 잘 숨겨놓아도 엄마의 레이더망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굳건히 지켰는데, 독립해 혼자살면서 자취를 감췄다.
지금도 어릴 적 만들었던 것과 같은 것이 생산된다. 그런데 그때처럼 방패 하나 노 하나에 색을 칠해가면서까지 정성을 다하진 못할 듯하다. 그때의 것을 재현한다 해도 그 순간의 것, 그 시간의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을 혹여 망가트려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작은딸이 옆에서 연신 쫑알쫑알 거리는 동안 내가 모았던 판만을 틀고 차마 아버지가 물려주신 판을 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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