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노력한 둔재의 삶과 정신 스며 있는 `괴산 취묵당'
평생 노력한 둔재의 삶과 정신 스며 있는 `괴산 취묵당'
  • 김형래 강동대학교 교수
  • 승인 2019.04.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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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학교 교수
김형래 강동대학교 교수

 

우리는 자신만의 재능을 타고난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을 양적인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과 비교하고 자신은 재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기 쉽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공한 사람들은 선천적인 재능보다도 노력, 훈련, 끈기, 집중 등의 요소가 결합해서 이루어진다. 어떤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머리'나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일을 시작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취묵당'은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 지은 정자이다. 괴강이 활처럼 굽어 흐르는 괴산읍 능촌리 강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괴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정자건축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축의 세부는 뛰어나다고 볼 수 없지만,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인정받았던 김득신(金得臣)의 유적지로서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취묵당'의 주인인 김득신(金得臣)은 `우둔했던 시인'으로 알려졌다. 조선의 유명한 학자들은 5살에 사서삼경을 떼었다는 등의 일화가 흔하지만, 김득신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서 10살이 돼서야 글공부를 시작했다. 달리 스승이 없었던 그의 삶을 지켜준 이는 부친이었다.

부제학과 경상감사를 역임한 부친 김치(金緻)는 아들의 노둔함을 질책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믿어주었다.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부단히 노력하여 5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취묵당을 짓고 거처를 목천에서 취묵당 옆 초당으로 옮겨 자연과 벗하면서 살았다. 때로는 벼슬살이를 위해 괴산을 떠났지만, 늘 마음은 취묵당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취묵당에서 그는 행복했다. 책을 읽고 시를 썼다. 김득신에게 취묵당은 학문과 예술을 싹트게 하는 창조적인 산실이었으며, 강학을 행하고 시상을 일깨우는 정신적 향유의 거점이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는 정자에 걸려 있는 `독수기(讀數記)'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독수기는 34세 때부터 67세 때까지 34년간 읽은 고문의 횟수와 목록이다. 1만 번 이상 읽은 책 36편의 문장을 나열하고 각 편의 읽은 횟수와 읽은 이유를 밝혔다.

이 가운데 <사기> 백이전(伯夷傳)이라는 책은 11만 3천 번을 넘게 읽었다는 전설 같은 일화도 전해지고 있으니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득신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취묵당을 `억만재(億萬齋)'라고 불렀다.

증평군 율리에 있는 그의 무덤 앞 묘비에는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려 있을 뿐이다(無以才不猶, 人自?也. 莫於我, 終亦有成. 在勉强而已).” 라고 씌어 있다.

김득신(金得臣)의 묘비명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준다. 그 어떤 명문(名文)보다도 함축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우둔했던 시인'으로 알려진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그럼에도 17세기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공부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우둔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인내하고 노력하였다. 한눈을 팔지 않고 한 길만 걸어, 결국 청운의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노력을 통해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으니, 그의 일생을 반추해 보고 그의 자취를 찾아보는 일은 의미 있는 탐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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