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즉시색
공즉시색
  •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9.04.18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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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불교를 포함한 동양의 신비주의자들이 깊은 사유의 결과로 얻은 깨달음이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것과 매우 잘 들어맞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에서 공(空)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진공과 유사한 개념이다. 반면 색(色)은 보이는 삼라만상을 말한다. 그런데 불교적 깨달음을 표현한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이라는 말은 이 둘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과학에서도 옛날에는 진공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空이었다. 물론 옛날에도 철학자들이 이 우주에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기는 했다. 하지만, 토리첼리가 시험관에 수은을 넣고 거꾸로 세워서 수은주의 높이가 76센티미터 이상 올라가지 않는 것을 보임으로써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존재는 실증되었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이 진공은 다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에, 에너지가 매우 큰 빛(감마선)을 통과시키면 전자와 양전자가 생겨난다. 전자도 물질이고 양전자도 물질이다. 하지만, 빛은 물질이 아니다. 이 현상을 설명하려고 물리학자들은 진공은 전자와 양전자가 모두 존재하면서 에너지가 마이너스(-)인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전자도 물질이고 양전자도 물질이다. 이 두 물질이, 물질이 아닌 진공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전자와 양전자를 서로의 반물질이라고 한다. 양전자는 전자의 반물질이고, 전자는 양전자의 반물질이다. 물질과 반물질이 합쳐지면 진공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전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성자, 중성자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에 대한 반입자도 존재할까? 그렇다. 모든 입자에는 반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떤 것은 실험을 통해서 실증되었고, 어떤 것은 아직 실증되지는 않았어도 과학자들은 존재한다는 것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진공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완전히 꽉 찬 공간이다. 오히려 우리들이 사는 이 공간이 덜 찬 공간이다. 진공은 물질과 반물질이 같은 양으로 존재하는 공간이고, 물질세계는 반물질이 없는 반만 찬 공간인 셈이다.

천지창조가 일어난 빅뱅의 순간에 물질과 반물질이 정확히 같은 양만큼 있었다면 이 우주는 진공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 균형이 아주 조금 깨어졌다. 물질이 반물질보다 약간, 그것도 아주 아주 약간 많았던 것이다. 이 약간의 차이가 하늘의 수많은 별과 은하와 그리고 이 지구와 이 지구의 온갖 생명들과 이 인간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사건이 된 것이다.

빅뱅이 일어나는 순간 아주, 아주 아주 약간만 달랐다면 이 우주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팽창하는 우주가 아니라 수축하는 우주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이 우주에 생명이라는 것이 생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아예 원자나 분자라는 것이 생겨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우연히, 정말로 어마어마한 우연으로 지금의 우주가 탄생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어마어마한 우연을 신의 의도적 결정이었다고 믿기도 한다. 우연이건 신의 뜻이건 그것은 과학적 논의의 대상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불교나 명상가들의 주장만이 아니고 현대과학에서도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존재인 色은 보다 더 완전한 존재인 空의 깨어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空卽是色 色卽是空, 과학자들이 어마어마하게 큰 가속기로 실험해서 알아낸 것을 옛 사람들은 골방에 앉아 명상만 해서 알아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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