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수지 4
구지수지 4
  •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 승인 2019.03.2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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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무각 스님 괴산 청운사 주지

 

忙忙撥草去追尋 水闊山遙路更深 力盡神疲無處覓 但聞楓樹晩蟬吟

(망망발초거추심 수활산요로갱심 력진신피무처멱 단문풍수만선음)

자기의 본심인 소를 찾아 나서다. 망망한 풀 헤치며 찾아 나섰는데 물 넓고 산 멀고 길은 더욱 험하네. 힘 달리고 정신 아득해 찾아지지 않고 들리느니 숲 속에 풀 벌레 울음소리뿐이로구나!

제가 상주하고 있는 산골 초암은 이제 겨우내 움츠렸던 도량이 다사로운 햇살을 받아 기지개를 켜고 있네요. 무문관 제3칙 구지수지 공안은 제법실상형 공안인데요. 이 시간에도 지난 시간에 이어 구지수지 공안에 무문 선사가 해설을 붙인 평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평창이란 본칙에 나오는 구지수지대해 무문선사의 견해로 강설하는 것을 말합니다.

無門曰 俱 竝童子悟處 不在指頭上 若向者裏見得 天龍同俱 竝童子與自己 一穽却(무문왈 구지 병동자오처가 부재지두상하지 약향자리견득하면 천룡동구와 병동자여자기를 일곶정각하리라.)가 무문 선사의 평창인데요.

구지 선사와 동자가 깨달은 곳이 손가락 끝에 있는 것은 아니지요. 만약 이 속을 향하여 보아 얻으면 천룡 선사와 구지 선사 그리고 동자와 자신을 하나로 꿰어 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또한 무문선사는 게송(頌)으로 읊기를.

俱 鈍置天龍 利刀單提勘小童 巨靈擡手無多子 分破華山千萬重(구지둔치노천룡이여 리도단제감소동이라. 거령대수무다자하여 분파화산천만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지 선사가 노천룡 선사를 가소롭게 여김이여 예리한 칼로 손가락을 끊어 어린 동자를 감정(勘定)하였네. 이것은 거령신(巨靈神)이 손을 들어 크고 작은 것 없이 천만의 첩첩한 준령(峻嶺)의 화산(華山)을 한 번에 분쇄해 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어린 동자승만 불쌍하게 손가락 하나를 잃었구나! 천룡과 구지와 무문은 잃은 것이 하나도 없네! 어린 동자승이 크게 깨쳤다고 하나 비가 올라치면 잘려나간 손가락만 아프다고 하네. 결국 여기까지 비심 비비심의 메타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지화상이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인 대목은 `비심비비심의 일물(一物)'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또 한 가지 놓치기 아까운 장면을 하나 소개하자면 그것은 동자가 깨친 내용입니다. 이것은 구지 선사가 깨친 내용이 나아가 조사(祖師)들의 선문답에서 볼 수 있는 부정의 부정인 활구(活句: 작용)로서의 작용을 하는 손가락을 의미합니다.

그 후 구지화상은 한 손가락에 깨치고 자신 또한 한 손가락으로 제자들을 제접하게 되었던 건데요. 주위 사람들이 구지화상은 어떻게 가르치나? 하고 질문하면 시봉하는 동자도 구지를 본떠 무조건 손가락 하나를 들곤 하였지요. 이를 본 구지화상이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버리자 동자는 뛰쳐나가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때 구지화상은 동자를 부르니 뒤돌아보았고 손가락 하나를 들자 바로 깨우쳤다는 이 일화 속에서 `손가락 하나 듦'은 바로 깨달음의 기연(機緣)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손가락 하나가 결국 우주 자체이면서 본래 면목이라는 것이며 바로 이 손가락 하나야말로 천지와 하나이면서 이 삼라만상은 제각각이지만 모아 놓으면 결국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한 손가락은 구지 자신이면서 저 자신이기도 하고 우주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무문관 제4칙 호자무수(胡子無鬚)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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