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운 날려 보내기
나쁜 기운 날려 보내기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3.06 20: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개구리가 눈망울을 굴리며 세상구경 나오는 경칩이다.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으니 얼마나 세상이 신비롭게 다가올까? 선조의 지혜로 이름 지어진 절기의 풍속은 자연 읽기에 충분하다. 요즘은 서구문화나 과학기술에 길들어 정신 못 차리고 오락가락하는 현대인이나 시도 때도 없이 피고 지고 출현하는 자연물을 보면 지구촌 생명이 혼란기를 맞이한 것 같다. 급변하는 시대를 맞아 한류의 열풍으로 한국의 문화가 지구촌을 들썩하게 하지만, 그 문화 속에는 우리 선조의 멋과 흥이 담겨 있는 듯하다.

경칩이 다가왔는데 필자는 생뚱맞게 정월대보름에 대해 말하고 싶다. 경칩이 지하와 지상의 경계에 있는 생명이 약동하는 날이라면, 정월대보름은 지하의 생명이 용트림하는 날이라고 한다. 귀동냥으로 들은 친정엄마의 이야기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새겨들어야 할 말들이 많다. 책에서도 보지 못한 이야기이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흥미진진하다. 필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산에서 해온 나무로 군불을 지피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밥을 지었다.

정월대보름 전날, 일 년에 한 번 동네 아낙들이 모여 우물을 청소했다. 우물의 물을 모두 퍼내고 젊은 새댁이 우물 바닥에 내려가 바닥까지 청소했다. 난 많고 많은 날 중에 왜 이 날에 우물청소를 할까 궁금했다. 청소를 다 하고 물이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네 아낙들은 우물이 차면 그 우물에서 길러온 물로 오곡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부엌에서 오곡밥을 지으며 친정엄마는 정월대보름을 기점으로 새벽에 땅속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모든 생명이 용트림하며 올라온다고 했다. 물도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발칵 뒤집히는 터라 보름 전날 우물을 깨끗이 청소해야 묵은 물과 섞이지 않고 샘물이 퐁퐁 솟아난다고 했다. 해서 동네 아줌마들은 샘물을 길어 정월대보름 음식을 만들었다.

엄마와 부엌에서 나누는 대화는 오곡밥과 나물에 가미되어 간간한 맛으로 스며들었다. 보름나물은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는 의미에서 지난해 준비한 아주까리, 묵나물, 고사리, 무, 콩나물, 호박꼬지, 가지, 냉이 등으로 만들었다. 나물은 통풍이 잘 드는 뒤란 처마나 기둥에 매달아 놓았던 것들이다. 첫술은 꼭 달이 훤히 내다보는 장독대와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성주 모시는 곳에 올려놓고 엄마는 “천지신명이시여”하며 가족과 이웃,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는 사이 남자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천방에서 쥐불놀이와 망우리놀이를 했다. 망우리는 깡통에 구멍을 듬성듬성 뚫어 그 안에 불붙은 나무를 넣고 “망우리여”하며 돌렸다. 망우리여 하는 소리가 클수록 액운과 더위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니 동네는 “망우리여”하는 소리로 들썩였다. 망우리 놀이를 마치고 아버지와 동생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오곡밥과 보름나물이 밥상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만든 보름음식은 일품이다. 국은 콩가루로 버무린 냉이와 시래기와 콩나물, 무, 고사리에 조선간장만 넣고 만들었지만, 입에 착착 감긴다. 장식 같이 올라온 알이 통통한 양미리조림은 입맛을 돋운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호두와 땅콩, 무로 부럼을 깼다.

정월대보름이라고 내가 소속된 단체에서 주민들을 불러 편을 갈라 윷놀이를 했다. 잘 모르고 지내던 이웃과 한팀이 되어 윷놀이를 하니 윷가락을 던질 때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현대문명에 밀려 사라지는 우리 전통놀이가 각박한 세상에 흐트러진 우리의 정신을 건전한 놀이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계승해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윷놀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정어머니가 오곡밥과 보름음식을 만들어 놨으니 가지고 가란다. 아직은 엄마가 살아 계셔서 엄마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엄마가 만든 음식을 생각하니 나쁜 기운은 사라지고 입에서 군침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