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맞서 싸운 아버지 … 나는 가난과 싸웠죠”
“일제에 맞서 싸운 아버지 … 나는 가난과 싸웠죠”
  • 연지민 기자
  • 승인 2019.02.27 2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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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 운동 100주년 - 충청타임즈 충청보훈대상으로 본 독립운동
■ 독립운동가 후손 3人 대담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됐다. 일본의 핍박에 항거한 이날은 독립을 위한 지난한 여정의 출발이었다. 수많은 독립지사가 국내외에서 피를 흘리고 몸을 바쳐 구국 활동에 나서면서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해방은 또 다른 피바람을 불러왔다. 세계열강들의 이념 논리에 남과 북으로 갈라선 한반도는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6·25전쟁과 폐허 속에서 궁핍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국가적 가난 앞에 법도 정의도 뒤로 밀려나면서 친일파가 득세했고, 독립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친 애국지사와 가족들에겐 가난이란 깊은 수렁만 안겨줬다. 2000년 이후 친일파 행적을 조사하며 역사바로잡기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지만, 친일척결은 3·1운동 100주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이에 본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의 궤적과 후손들의 삶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대담에는 서상국 광복회 충북지부장과 김원진 전 지부장, 오광수씨가 배석했다. 이들은 충북도와 국가보훈처, 충청타임즈가 공동 주최하는 `충청보훈대상'의 특별상 수상자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다. 선대가 물려준 강인한 정신이 어떻게 빛을 발하는지 엿볼 수 있다.

서상국 광복회 충북지부장
서상국 광복회 충북지부장

“아버지, 광복단 암살단 조직
옥살이 끝 6·25때 돌아가셔
호적 없고 학교 갈 형편 안돼
행상 다닌 母도 대쪽 같았다”

-서상국 광복회 충북지부장
△ 아버지 서대순 애국지사는 20대에 학교에 근무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4월 혁신단 조직에 가담해 혁신공보, 자유신보를 발간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광복단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총독을 암살하려다 또 다시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날의 거사는 실패했지만 쉰의 나이에 아들 서상국씨를 얻었다. 해방의 감격을 맞으셨지만 6·25때 돌아가신 탓에 모자는 가난 속에 살아야 했다.

서 지부장은 “거사가 성공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거다. 그래서 더부살이 삶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며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가인 충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어머니가 행상하며 사셨다”고 들려줬다.

가난은 일상이었다. 다들 어려운 때라 누구에게 의탁할 수도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돼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고, 대학 갈 형편이 못돼 군대로 진로를 잡았다”는 서 지부장은 “아버지를 대신해 가정을 꾸려야 했던 어머니도 대쪽 같으셨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랫동안 호적이 없었다. 당시 만들 상황이 아니었겠지만, 호적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했다. 재판을 해서 호적을 만들고 학교에 갔다”면서 “어릴 적엔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컸다. 쉰에 낳은 자식 호적 하나 만들어 주지 못하셨나 하고 말이다. 그래도 사명감으로 사셨던 아버지였기에 자랑스럽다”며 미소를 지었다.

 

김원진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
김원진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

“부친, 독립운동 최전선 활동
9세에 어머니 잃고 가장노릇
궂은 일해 여동생 국수 먹여
서라벌예대 합격 생업탓 포기”

-김원진 전 광복회 충북지부장
△ 아버지 김창도 애국지사는 1919년 평양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홍범도 장군 휘하에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다. 1927년 동명중학교에서 동포를 대상으로 민족교육 교사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 남에서 군 생활을 하다 전역 후 1968년 작고했다.

아들 김원진씨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독립운동 최전선에 있던 아버지였기에 1947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9살에 소년가장이 된 그는 삶이 한 편의 드라마다. 가혹한 현실은 어린 가장의 몫이었다.

그는 “해방 후 북한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아버지를 찾으려면 서울에서 이범석 장군이나 이청천 장군을 찾으라는 말을 남기고 남쪽으로 가셨다”며 “당시 9살인 나는 3살 아래 여동생과 살아야 했다. 동네에서 때꺼리를 얻어먹으며 살다가 12살에 동생을 데리고 걷다 도둑기차를 탔다가 문전걸식하며 두 달 걸려 서울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군인들은 돈을 받지 못했다. 어렵게 아버지를 찾았지만 돌봐줄 수 없었다. 피난민수용소에서 동생과 생활하며 구두도 닦고, 신문도 팔면서 국수 먹을 정도의 생활을 했다”면서 “아버지가 온양으로 옮기면서 동생과 온양여관에서 청소해주며 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다 부대이동으로 아버지와의 이별을 반복하다 증평 37사단에서 마지막 군 생활을 접은 후 우암동에 터를 잡고 살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가난은 벗어날 수 없었다. 군 제대 후 받은 3000환으로 집을 얻은 게 다였다. 17살 된 그는 비누장사와 학생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었고, 공부에 욕심 있어 서라벌예대를 지원해 합격했지만 한 달도 채 못돼 중도 포기했다. “늙으신 아버지와 동생이 있으니 나만 생각할 수 없었다. 혼자라면 살겠지만, 집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그는 “비록 문인으로의 꿈을 접었지만, 틈틈이 아버지와 자신의 일대기를 책으로 발간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오광수 광복회원
오광수 광복회원

조부, 만세운동 발각 후 남하
고발 잦아 산에서 움막 생활
공납금 못 내 졸업장 못 받아
代 이은 가난에 선대 원망도”

-오광수 광복회원
△할아버지 오봉오 애국지사는 이북에서 3·1만세운동을 준비하다 사전에 발각돼 남하했다.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내려와서는 대전 유성에 자리 잡았다. 타향으로 전전하며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보니 가난은 대를 이었다. 장남인 아버지는 군납을 하며 살았지만, 북에서 내려왔다는 이유로 고발이 잦아지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기까지 했다. 손자 오광수씨 역시 집안이 어려워 학업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돈이 없다 보니 학교생활도 어려웠다. 당시에는 돈을 내지 않으면 선생한테 두들겨 맞던 때였다. 어깨너머로 중학교까지 공부했는데 졸업장이 없다. 돈을 내지 않아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며 “먹고살기 어려워 군대에 갔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가 미용기술을 가지고 있어 가난을 면할 수 있게 됐다.”

가난이 대를 이으면서 선대에 대한 원망도 크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훌륭한 일을 하셨지만 후손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원망이 깊을 수 밖에 없다”면서 “솔직히 자식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그러면 큰일을 못했겠지만, 후손들의 삶도 중요하다. 가난해서 가난이 이어지면서 배움도 짧다 보니 사회에서 성공하기가 어렵다. 국가가 바로잡지 못한 것도 원인이다”고 말했다.

친일척결이 미뤄지는 동안 독립지사 후손들은 가난이라는 해방의 그늘 속에 있어야 했다. 충북에는 그런 광복회 회원들이 500여명 남짓 된다. 하지만, 가난만을 탓하지 않았다. 서상국 지부장과 김원진 전 지부장은 2013년 민영은 일가가 청주시를 상대로 낸 토지 반환 요구에 반대운동으로 앞장섰다. 고령의 나이지만 법원 앞에서 1인 시위도 하고 시민들에게 서명도 받았다. 또한 괴산 홍명희 일가가 낸 120만평 반환 소송에도 적극 대응해 국고로 환수할 수 있도록 했다. 역사바로세우기란 작은 것부터 실천해나가는 것이란 믿음에서다.

서상국 지부장은 “부끄러워서 오히려 시사해야 할 이들이 토지반환 신청을 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독립지사 후손들은 다들 어려운 시기를 살아왔다. 그래도 유전자적으로 강인한 인자들이 있는 분들이라 먹고살 정도로 자리 잡았다”며 “가난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국가를 위해 자기의 소신대로 살았던 부모님들이었기에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다. 광복회 회원으로 값진 역사를 물려주기 위해 노력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리 연지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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