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할매
시인 할매
  • 강대헌 에세이스트
  • 승인 2019.02.21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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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헌의 소품문 (小品文)
강대헌 에세이스트
강대헌 에세이스트

 

“사박사박/장독에도/지붕에도/대나무에도/걸어가는 내 머리 위에도/잘 살았다/잘 견뎠다/사박사박”

전남 곡성군 입면 서봉리 `길작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윤금순 할머니가 쓴 `눈'이란 시입니다.

한글도 모르던 할머니가 쓴 시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더욱 새로웠습니다. 물론 저절로 된 일은 아니더군요. 2년 정도 먼저 한글을 배우고 난 뒤에 김선자 관장이 시를 써 보라는 숙제를 냈던 겁니다.

“시를 쓰라화니...어떠캐 쓸카.”

“시를 통해 삶이 그대로 녹아나길, 삶에서 나오는 무게감이 느껴지길” 바라는 김선자 관장의 뜻이 들어 있긴 했지만, 처음의 반응은 그닥 신통치 않았지요.

시를 쓰라는 말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분은 윤금순 할머니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함께 한글 수업을 받던 다른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막상 하고 보니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할머니들은 시로 지나온 삶을 한 토막, 한 토막 끄집어내신다”고 김선자 관장이 감탄할 정도였죠.

2016년에 할머니들은 `시집살이 시(詩)집살이'라는 책까지 냈고, 이에 감명과 충격을 받은 이종은 감독이 할머니들의 달라진 일상을 영화 `시인 할매(The Poem, My Old Mother, 2018)'라는 기록으로 남겼지요.

개봉일을 기다렸다가 냉큼 달려갔습니다.

86분의 러닝 타임 동안 할머니들은 스크린 안에서 열심히 시를 썼고, 스크린 밖의 저는 어린 아이처럼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마음에 붉은 꽃들이 피어나기도 했습니다.

평생 손에 흙만 묻혀온 할머니들이 무슨 시까지 손을 댈까 하는 생각은 쓸데없는 노파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먼저 가신 임의 무덤가 산밭에서 때론 호미를 집어던지고 털버덕 주저앉은 때도 있었겠지만, 부모의 품 같았던 정든 고향을 떠난 자식들 걱정에 단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많았겠지만 할머니들은 거뜬히 시를 토해냈습니다.

`벌로 살았다며(그냥 살았다며)'수줍어하던 할머니들이 시인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콩 한 알, 풀꽃 한 송이, 서산에 물드는 저녁놀을 처음 대면한 듯 놀라워하고 그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시를 쓰든 쓰지 않든 시인이다”는 고진하 시인의 말이 고맙습니다.

이 땅 곡성의 할매들만 어디 시인이겠습니까. 제가 영화 `칠곡 가시나들(Granny Poetry Club, 2019)'을 기다리는 이유입니다. 그곳의 할매들도 밥처럼 시를 짓는다는군요.

영화 `시인 할매'의 엔딩 크레디트에서 양양금 할머니가 마을의 양지바른 담벼락 앞에 앉아 `해당화'라는 자작시를 찬찬히 낭송하던 장면이 눈에 어른거립니다.

“해당화 싹이 졌다가/봄이 오면 새싹이 다시 펴서/꽃이 피건만/한번 가신 부모님은/다시 돌아오지 않네//달이 밝기도 하다/저기 저 달은 우리 부모님 계신 곳도/비춰 주겠지/우리 부모님 계신 곳에 해당화도/피어있겠지”

“세상 모든 어머니가 삶 속에서 하는 말은 시가 된다”는 김용택 시인의 말도 고맙습니다.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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