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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9.02.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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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큰 말은 쉽다. 누구나 국가와 민족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핍박받는 너와 바로 우리 주위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까 대통령 욕은 하기 쉬워도, 도지사, 구청장, 동장 욕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한국의 정치를 말하기는 쉬워도 지역의 정치를 말하기는 어렵고, 민족을 말하기는 쉬워도 이웃 주민을 말하기는 어렵다. 왜일까? 그것은 구체성이라는 분명한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추상적인 것은 오히려 쉽다. 나무를 말할 수는 있어도,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이'나무는 물을 좋아하고 `저'나무는 바람을 좋아하고 `그'나무는 햇볕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를 섞어 이 나무는 햇볕은 좋아하지만 물을 싫어하고, 저 나무는 바람을 좋아하지만 햇볕은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가히 전문가라 할 수 있다.

한미관계를 말하고, 북미관계를 말하고, 남북관계를 말하기는 쉬울 수 있지만 사드 배치 문제, 해군기지 건립 문제, 아니, 하다못해 국립공원 사찰 입장료 문제는 말하기가 정말 어렵다. 작으면 작을수록 어려워진다. 거기에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되어 있는데다가 감정의 골도 시간이 가면서 깊어만 가고, 아울러 개개인의 판단은 실질적인 삶의 태도와 직결되어 있어 백인백색(百人百色)의 가치관을 통틀어 다루기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지역학이고 지방문제다. 그런데 위에서나 아래서나, 남이나 나나 이를 홀시하는 바람에 자꾸 미궁에 빠지는 것이 지방문제고 지역학이다.

사실 사람들의 시각과 태도를 지역화, 지방화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어법에서 `지방화, 지역화'라는 말은 상당 부분 부정적인 어감을 일으킨다. 전체로 가고, 중앙으로 가고, 통일해야 옳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역(地域) 없는 전역(全域) 없고, 지방(地方) 없는 사방팔방(四方八方)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땅 없는 나라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땅'(地)을 자꾸만 빼버리면 `나라'(國)가 아무리 거창해도 마치 유령회사처럼 사람도 없고 실물도 없는 종이쪽지가 돼버리고 만다.

내 경우도 지역 이야기를 담는 글이 훨씬 힘들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한다. 이른바 지역현안이 더 다루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것이 동물원이 되었던, 철도가 되었던, 공원이 되었던, 시내버스노선이 되었던 그러하다. 아직도 중앙에 휘둘리는 정치구조가 이런 불상사를 일으키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식까지 중앙에 빼앗겨버리면 이거야말로 난국이다. 이런 상황은 마치 외교권 없는 대한제국의 황실과도 비슷하다. 임금은 있으나 나라가 없는, 도지사는 있으나 도가 없는.

사실 지역방송(지방언론까지 포함해서)에 무관심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다. 먼저, 서울이 돈이 되니 그렇다. 그러나 내가 본 강원방송이나 광주와 대구방송은 나름대로 지역문제에 투철했다.`서울과는 먼 강원도라서', `민주화운동의 본거지라서', `잘나가던 도시라서'라는 변명은 우리의 상황을 변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지역의 한계와 보수성(그나마 끼리끼리 먹고사는)이 자꾸만 연결되는 까닭이 이런 나약함과 비굴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수치가 떨어져도, 사업에 탈락돼도, 공공시설이 태부족해도 그저 `소수의 비애'로 여기는 한 우리는 아Q, 아니 `아Q충북'일 수밖에 없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정신은 승리했다고 외치는 아Q, 꼭 내 꼴이다. 아Q여, 안녕!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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