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고(無爲苦)
무위고(無爲苦)
  • 전영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1.30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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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전영순 문학평론가
전영순 문학평론가

 

사치병을 앓는 게 틀림없다. 언제부터 이토록 여유로웠는가? 안일과 나태로 무기력해진 자신이 싫어서 길을 나섰다. 천지가 고요하다. 추위를 핑계 삼아 완전무장하고 나온 나와는 달리 나목은 추위를 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신이 나약해져 있는 나로서는 헐벗고도 추위와 싸우는 것들이 위대해 보인다.

독감을 지독하게 앓고 나니 만사가 귀찮다. 산촌 출신이라 어지간히 아파도 따뜻한 방에 하룻밤만 자고 나면 거뜬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보름 넘도록 칩거를 했는데도 불편하다. 산골에서 굳건히 키워온 에너지가 거의 소진된 것인가? 독감 탓에 약에 치여 정신이야 해롱거린다고 치더라도 한때 “금이야 옥이야” 하며 하늘 높이 떠받던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육신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심신을 양육해 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왔다. 운동 삼아 자주 다니던 인근의 야트막한 등산로를 걷고 있다. 몽롱한 정신 속으로 여러 개의 길이 흔들린다.

젊은 날에는 “나는 누구인가?”를 두고 고민했다면, 중년이 된 지금은 “남은 생을 어떻게 살까?”가 고민이다. 군중 속의 고독, 무기력함이 동반된 중년의 병을 지독하게 앓는 요즘은 중심 잡기가 그리 쉽지 않다. 노년에 나타나는 사고(四苦) 중 하나인 무위고(無爲苦)를 앞당겨 체험하고 있나 보다. 본인이 뜻하는 대로 정신과 몸이 따라주지를 않는다. 내게 주어진 이 비틀거림이 내 생의 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약해진 심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정신을 다잡는 중이다.

산을 오르며 생각한다. 한 시간 남짓한 등산이지만 집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여러 갈래 길이 있다. 습관처럼 평상시 다니는 길을 걷고 있다. 가끔 청년의 힘줄처럼 불끈 솟은 나무뿌리를 밟으며 걷기도 한다. 내 힘줄도 나무뿌리처럼 단단해지리라는 기대 심리로 밟다가도 나무에 미안한 생각이 들면 살짝 벗어나 흙을 밟으며 걷는다. 독감으로 무기력해진 나는 갈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오늘은 뜬금없이 몇 년 전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한 여인이 바람결에 휘 지나간다.

가정이나 사회적으로 남부러울 게 하나도 없던 사람, 부(富)도 명예도 가질 만큼 가진 여인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남편과 건강한 아들딸이 있고, 괜찮은 직장에 잘 다니던 여인의 비보가 어느 주말 오후에 전달되었다. 우울증을 앓다가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다른 세상으로 갔다. 누가 봐도 외적으로 아무 일 없어 보였지만, 그녀는 그녀에게 내재된 무한의 고독과 얼마나 투쟁하다 선택한 길일까? 산을 오르는데 걸음이 잠시 주춤거린다. 갈림길이다. 순간의 선택이 운명을 좌우하듯 정신을 차리고 조금 힘든 오르막길을 택했다.

남들처럼 편히 살아갈 수 있지만,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해롱거리는 날이 길어지면서 미뤄놓은 일들이 몇 달 분량이다. 심신이 피곤하고 무기력해질 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짐승처럼 동면이나 할까 싶다가도 아니지, 그래도 아직은 열심히 살아야 할 나이다 싶어 마음을 다잡는다.

찬바람 속에 힘겨운 보따리를 풀며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들여다본다. 들여다보니 나에게 붙어진 이름이 너무 많다. 작년에 버거운 짐 하나를 “휙” 집어던져 시원해졌는데도 아직 떨쳐버려야 할 게 더 있나 보다. 오지랖 넓게 내 본업보다 주변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관계 맺기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라 쉬이 던져버리지 못하고 몇 년째 눈치만 보는 일도 있다. 올해도 던져버리기에는 힘들 것 같다. 피해 갈 수 없는 일이라면 가능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해야겠다.

오늘 산행에서 맞은 찬바람은 얼마만큼 내 정신과 육신을 깨우고 갔을까? 신도 인간의 일대기를 막을 수 없듯이 어차피 중년에 겪어야 할 사치병이라면 달게 받아들여야겠다. 저만치서 어르신들 한 소대가 팔을 씩씩하게 흔들며 걸어온다. 그들보다 한참 젊은 내가 주눅이 들 만큼 건강해 보인다. 짐짓 건강한 척 나도 씩씩하게 그들 앞을 지나간다.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밀린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심신을 잘 다스려야겠다. 이불을 걷어차고 나온 일은 참 잘한 일이다. 매서운 날씨에 까치 소리가 명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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