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流配)
유배(流配)
  •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 승인 2019.01.13 20: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실장

 

5, 6급 공무원의 권력 비위에 대한 내부 고발에 온 나라가 들썩인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에게 부여된 권한이 절대 작지 않았던 사실도 함께 드러난다. 고위층 관료에 대한 비리 첩보나 국가정책에 대한 결정 요소들은 대중이 범접할 수 없는 최고 수준의 정보들이다. 그들의 주장이 언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보면 민의의 적잖은 변화로도 읽힌다. 하지만, 언론에 노출된 글 속에서 권력의 향유마저 느껴지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1894년 새로운 관리임용제도 속에서도 일제가 식민지 정책으로 유지한 고등문관시험, 곧 고시는 과거(科擧)와 다르지 않다. 식민지 인민의 충성을 유도하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고도화된 지배정책은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였다. 과거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길이었다. 문과 급제자는 출사 후 곧 당상관의 반열에 오르고, 나아가 영감(令監)님이 되었다. 물론 상당수 관료는 조상 덕에 음직(蔭職)으로 나갔으니 이 또한 봉건적인 혜택이었다.

하지만 제한된 관직 수에 비해 출사자가 지나치게 많다 보니 이를 제어하려는 통제 장치가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끊임없던 사화와 당쟁으로 공급과 수요를 조절할 수 있었다. 권력의 추가 바뀌면서 자연 발생할 수 있는 논공행상은 여전히 한정된 관직 수에 부딪히곤 한다. 요직은 좌천이니, 한직이니 하는 말이 생기고, 밀려난 이들은 정치적인 피해를 호소한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묘수로 유배를 택했다.

전통시대 죄를 지은 경우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형(死刑) 등 다섯 형벌에 처했다. 사대부는 매를 칠 수 없다 하여 유배형으로부터 시작한다. 유형은 고려 때 귀향(歸鄕)에 이어 조선시대 죄인을 외진 곳에 가두는, 귀양이라 부르는 형벌이다. 사형은 목을 매는 교형과 목을 자르는 참형이 있었다. 사형에 준하는 죄를 지은 관리에게는 임금이 사약(賜藥)을 내려 자결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역이나 강상윤리를 저버린 경우가 아니라면 사대부는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2, 3천 리 밖으로 내칠 수 없으니 오지나 절도(絶島)로 보냈다. 위리안치와 같이 꼼짝없이 가두는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 일정한 자유가 허용되었다. 실제 높은 벼슬아치의 경우, 죄가 풀려 다시 등용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지역 수령이나 유력자의 후원이 계속된 경우도 많았다. 그 때문에 유배지에서 제자를 기르거나 지역 유림과 교유하며 재기를 꿈꿨다.

유배지에서 남긴 일기나 문학작품들은 오늘날까지 시대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 시절 중 11년을 보낸 강진에서 500권의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수령의 도움과 외가 쪽 인연으로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당쟁의 중심에 섰던 우암 또한 남인(南人)이 집권하는 순간, 유배의 길을 떠났다. 1674년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이듬해 1월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 덕원(德原)으로 귀양 갔다. 곧이어 6월 경상도 장기(長?), 1679년 4월 다시 거제로 옮겨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정국이 뒤바뀌어 풀려날 때까지 6년 가깝게 극변과 절도를 전전했다. 역시 이 시기 여러 저작을 남긴 것은 물론이며,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국에 대한 논의를 주도했다.

그렇지만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정국이 뒤바뀌자 다시 제주로의 먼 길을 떠났다. 83세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3개월을 지낸 후 다시 불러들인 후 사약을 가지고 출발한 관리와 맞닥뜨린 정읍에서 결국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거침없이 시대를 이끌었던 큰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