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스포츠 강국
부끄러운 스포츠 강국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9.01.13 2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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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한국에서 핸드볼 선수로 살아가기- 은퇴한 여자핸드볼 선수의 삶에 관한 내러티브'라는 긴 제목의 논문이 발표된 것은 7년 전인 2012년이다. 핸드볼 선수 출신 최희윤씨와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가 공동 저술했다. 내용은 충격적이다. 연구논문이 아니라 체육계에 만연한 여자선수들에 대한 폭행과 성폭력을 고발하는 탄원서에 가까웠다.

논문은 은퇴한 여자선수 4명이 당한 피해를 인용했다. 그들이 코치에게 당한 폭행은 일상적이고 엽기적이었다. 실내화로 얼굴을 때리기 일쑤고 고무판을 얼굴에 씌운 후 발길질을 하다가 넘어지면 밟았다고 한다. 귀를 잡고 얼굴을 때리다가 바닥에 패대기를 쳐 귓볼이 찢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뭉둥이로 맞을 때가 그나마 견딜만 했다고 하니 폭행의 수위를 짐작할 만하다.

선수들이 성폭력을 당한 대목은 구체적으로 옮기기가 민망할 정도다. 함부로 혀를 들이대고 몸을 만지기 일쑤였다고 했다. 어느 코치가 했다는 “나는 룸살롱 안 간다. 여자선수들이 있으니까”라는 끔찍한 농담은 이 충격적 실태를 암시한다.

체육계는 물론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어야 할 이 논문은 당시 주목도 반향도 얻지 못했다. 은퇴 선수들의 용기에 체육계는 눈과 귀를 닫았다. 비인기 종목에 무명의 선수들이 낸 목소리는 사회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심 선수에 대한 성폭력은 이 논문이 발표된 이후 벌어졌다. “이러다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 속에서 당했던 폭행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있었지만 말이다.

당시 체육회가 논문을 외면하지 않고 실태조사에 나서 관련자를 징계하고 엄중한 경종을 울렸다면 심 선수의 피해는 예방됐을지도 모른다. 빙상계 폭력실태를 조사해온 `젊은빙상인연대'는 심 선수처럼 코치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자선수가 5~6명 더 있다고 밝혔다. 민간모임에서 이런 조사를 하는 동안 빙상연맹이나 체육회는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코치라는 탈을 쓴 폭행범을 방치해 성폭력으로 치닫게 하고, 성폭력범도 제어하지 못해 피해자를 늘린 체육회의 존재 이유가 궁금하다.

무엇보다 우리가 스포츠 강국을 자부할 수 있느냐는 부끄러움을 떨칠 수 없다. 선수가 인격을 반납하고 비인간적인 폭행에까지 복종해야 하는 국가대표 양성 시스템에서 건진 금메달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서커스단에서 짐승을 조련하듯 매질로 선수를 단련해서 얻은 금메달은 국제적으로도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용인하는 금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시그널에 다름 아니다. 인간 이하의 학대를 받는 생지옥에서 만들어진 영웅에게 국민이 환호하는 비정한 장면은 더 이상 전개돼선 안 된다. 검투사들의 시합에 열광했던 옛 로마시민과 다를 게 무엇인가.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연금을 주는 선진국은 거의 없다. 국가를 대표해 출전하는 자체가 일생일대의 영광인데, 여기에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상식이다. 의사나 주부를 올림픽 대표선수로 발탁하며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지향하는 그들을 배워선 안 될 이유가 없다. 이젠 우리가 허세까지 부려가며 국제적 명성에 목을 매던 시대도 지났다. 금메달이 인생을 결정할 유일한 목표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는 그 목표로 가는 길목을 틀어쥔 지도자에게 절대권력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 그 현격한 갑을관계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선수 라커룸이 탄생한 것이다.

사람다운 삶은 예외 없이 보장돼야 한다. 국가가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책무이다. 선수촌 일부가 인간적 삶이 부정되고 유보되는 야만적 공간으로 방치돼온 데 대해 정부가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이다. 폐습을 외면하고 키워온 대한체육회부터 물갈이해야 한다. 성적보다 선수들의 인격을 소중하게 생각할 비체육인의 영입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 선수촌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엘리트 중심의 선수육성 정책을 펼치는 것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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