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투
감투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9.01.0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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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강추위가 가만가만 며칠을 두고 틈을 엿보고 있다. 이번 주말은 참아주었으면 했다. 하필이면 오늘, 고약한 성깔을 제대로 드러내고 만다. 강산이 몇 번 변하도록 처음으로 나선 여행에 한파주의보라니. 자주 만나지 못해 겨우 잡은 나들이를 시샘하기라도 하듯 심술을 부린다. 단단히 차려입은 옷차림으로 몸이 한껏 불어나 있다. 서슬이 시퍼런 추위에도 얼굴에는 설렘이 피어난다. 동장군도 우리의 강우정(强友情)을 말리지 못한다.

쉰 중반인 내가 막내로 여섯 명의 자칭 여걸(女傑)들이다. 꼭 같은 나이라는 법은 없다. 어찌 친구들 간의 정만을 일컬으랴. 마음이 통하여 정을 나누는 관계면 친구지 않은가. 밤기차는 정동진을 향하여 어둠을 뚫는다. 굳이 해돋이를 볼 목적이 아니다. 그저 좋아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떠나는 번개여행인 셈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사람들이 많다. 역에서 우르르 내리는 인파에 위로가 된다. 동질감에서 오는 위안이랄까. 내리기가 무섭게 달라붙는 시린 바람에 신새벽에도 깨어 있는 찻집이 반갑다. 차로 속을 따뜻하게 데우며 해 뜰 시간까지 보낼 수 있다는 안도감을 내려놓는다. 몸이 녹으면서 이야기도 서로에게 녹아들어 간다. 고생할 게 뻔하다고 말리던 그이의 말은 기우였다. 즐거운 수다로 소확행이 먼저 터를 잡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수선스러워진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제보가 온 모양이다. 서둘러 바닷가로 나가 먼 수평선에 초점을 맞춘다. 미동도 없던 바다에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점점 영역을 넓혀 색이 짙어지고 있다. 한참을 뜸들이던 해가 바다 끝에 삐끔 얼굴을 내민다. 눈부신 모습이 찰칵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핸드폰에 담긴다.

어느새 해는 물에서 빠져나와 하늘에 둥긋 떠있다. 해돋이를 본 사람들은 바람을 피하여 도망을 친다. 동장군에 맞서서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 찻집으로 들어가 앉았다. 집에 돌아가는 기차가 오기까지의 시간을 보낼 요량이다. 찻잔이 반쯤 비어갈 무렵 문자가 날아든다. 기차의 운행정지로 환불 조치를 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지 역으로 가 보았다. ktx탈선 사고로 기차가 가지 못한다고 한다. 다른 손님들에게 강릉터미널을 가서 버스를 타라고 안내를 하고 있다. 우리 일행에게도 터미널까지는 차로 30분이 소요된다며 친절히 설명하던 중에 역 직원은 자기의 차로 데려다 준다고 한다. 차 안에 다 탔다. 연배가 있어 보여 고생할 것 같아 차마 안 되겠더라고 말하는 분은 역장님이었다.

다섯 명이 끼여 앉은 뒷좌석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다리도 저리고 숨이 막히지만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다. 책임감으로 베푼 친절인지 모른다. 그래도 마음온도는 올라 잔득대던 한기도 주눅이 들었다. 안으로 송글송글 결로가 맺힌다. 이내 흥건하게 젖는다. 이건 감동이다.

그의 배려는 어느 순간 잔잔한 파문으로 와 온 마음에 물결 친다. 감동은 큰 데서 오는 게 아니다. 작은 진동이 멈추지 않아 진자운동이 되는 것이다. 미투로 오랫동안 떠들썩하더니 그 뒤를 빚투가 잇는다. 초풍할 소식들로 살기 어려운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있다. 지금의 감동이 투(too)로 세상에 일렁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받은 따뜻한 울림. 내 안에 가두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감동의 바람을 꿈꾼다. 그래서 같이 행복해지는 이 바람을 감(感)투(too)라 이름 붙이고 싶다. 감투를 싫어하는 이는 없다. 그리하여 빚투가 오금이 저려 꼼짝을 못하는 상상을 펼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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