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81>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81>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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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의 해상제국 건설의 몰락과 명의 쇄국정책

해상길 빗장 '꽁꽁'국운은 바다서 갈렸다

   
▲ 이슬람세계 특유의 경제기구와 경제활동이 이루어 지는 장소 구획인 바자르.

천하를 호령하던 영락제는 1421년 5월 9일 자금성의 한 궁전지붕에 벼락이 내려 궁 전체를 화마에 휩싸이게 되는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불은 태화전(太和殿), 중(中)화전, 보(保)화전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옥좌마저 숯덩이가 되도록 태워버렸다. 이로 인해 상심한 황제는 자리에 앓아누웠고, 후궁들의 처소가 불에 타버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불길한 하늘의 징조에 영락제는 비탄에 잠겼다. 잠시 태자 주고치에게 왕권을 물려주기까지 하였다.

막대한 비용이 든 자금성 건설과 곡식운송을 위한 대운하 재건, 알 수 없는 남부지방의 역병의 창궐로 인해 시체가 들판에 썩어 나갔다. 수백 마일의 만리장성 보수와 대보선단 건조로 인한 중국경제는 크게 위축되었다. 안남과 베트남 지역의 반란과 몽골의 수장 아구타이의 조공 거절을 응징하기 위해 참가한 전투에서 영락제는 6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424년 아들 주고치가 홍희제(洪熙帝)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선황제의 위대한 해상제국 건설에 부정적이었다. 동시에 외국 원정에 필요한 물품 조달과 동화주조, 그리고 사향, 생동(生銅), 생사(生絲) 원료 등의 수입을 금하였다.

1435년 보선들의 항해 전면 금지

홍희제는 즉위한 지 1년 뒤인 142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주첨기가 선덕제(宣德帝)로 즉위하여 한층 더 쇄국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435년 선덕제가 죽자 극단적인 외국 혐오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보선들의 항해가 전면 금지되었다. 황제가 내린 초기 포고문들은 교역과 항해를 금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외국과 교역을 시도하는 상인들은 모두 해적으로 간주하여 처형했다. 해외교역의 봉쇄는 이후 수백년간 완강히 지속되었다. 명나라의 정책을 이어받은 청나라는 해외교역 봉쇄를 더 강화하여 쇠락하고 멸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조선소는 폐쇄되었고, 대형 보선의 건조계획과 정화의 원정기록은 파기되었다. 병부낭중 유대하(劉大夏)는 "삼보 정화의 서쪽 대양 원정에 들어간 비용과 곡식은 막대하였고, 참여한 인원의 희생 또한 엄청났으며, 선단이 중국에 들어온 물품들은 보잘 것 없었다.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는 내용들은 태워 없애버려야 한다"고 공문서에 기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던 정화의 원정기록 일부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며, 중국인의 마음속엔 세계에 대한 열린 생각을 닫게 만드는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결국 동양의 뛰어난 문명은 유럽문명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쇠락의 길로 서서히 접어드는 계기게 되었다.

실크로드 답사를 준비하면서 가장 궁금했던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동양의 선진문명이 어떤 이유로 서구문명에 역전되어야 했는지의 근본동기와 문화 예술에 있어 육체나 애정의 솔직한 서구식 표현과 폐쇄적이고 은둔적인 동양의 차이였다. 총체적으로 많은 문제와 원인이 있겠지만, 명나라 영락제 이후 취해진 중국의 쇄국정책이 근본 원인이라 생각되며 동서양의 표현차이는 그리스 에게해에서 수영을 하면서 나름대로 그 해답을 얻게 되었다.

정화선단의 위대한 업적과 지도제작은 중국에서 외면 받고 파기된 채 방치되었지만, 그 일부가 신세계 개척을 꿈꾸었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으로 넘어가 그들이 세계를 정복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포르투갈의 항해 왕 엔리케는 1419년 성탄절에 포르투갈 남서부의 사그레스를 그의 영구기지로 건설하고 예배당과 병원, 항해학교를 세웠다. 이 일로 그는 항해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세계사의 진로를 바꾸는 획기적인 일들을 수행하게 되었다.

1424년 다 콘티로부터 바다 너머에 새로운 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엔리케의 형 동 페드루는 12년간의 여행 끝에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남북 아메리카, 북극과 남극, 인도, 호주, 중국을 보여주는 정화 함대가 제작한 세계지도 한 장을 갖고 1428년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그 지도에 대한 정보는 엄청나게 귀중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이후 100년 이상 유럽의 경쟁국들이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도록 노력을 했다. 그 세계지도는 엔리케의 항해술과 선박 설계의 개선과 함께 유럽의 탐험에 있어 영구적인 대변혁을 가져왔다. 탐험대를 출발시킬 자금만 확보한다면 포르투갈은 세계를 지배하리라는 것을 엔리케는 알고 있었다.

영국 해군 장교로 17년간 복무하다 퇴역한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는 우연히 접한 세계지도 한 장을 통해 세계사를 바꾸어 놓을 실마리를 찾아내고 'The Year China Discover The World'를 저술하였다. 14년 동안 무려 140여 개국, 900곳 이상의 문서보관서, 도서관, 과학연구소, 중세 후기의 중요 항구 등을 답사했다. 그가 섭렵한 옛 지도, 각종 문헌, 동식물, 유물과 유적, 고대의 건축물, 비석, 바위, 그리고 전문가나 지역 주민들과의 인터뷰나 고증 자료를 통해 중세 해양사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14세기 전반 아랍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는 30년간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 10만km를 편력하면서 쓴 여행기 가운데 중국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 무려 석 달 동안 항구에 체류한 내용이 남아있다. 큰 배는 1000명이나 승선하는데, 그 중 600명은 선원이고 400명은 전투원들이다. 전투원 중에는 총수(銃手)와 방패수, 궁수(弓手) 등이 있는데 그들은 나프트(naft)로 발사한다. 큰 배에는 3척의 작은 배가 뒤따르는데 이 3척의 배는 모선에 비해 그 절반이나 3분의 1 혹은 4분의 1의 크기이다. 세상에는 중국인 만큼 돈 많은 사람이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개빈 멘지스에 따르면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 초기 유럽 탐험가들이 발견한 땅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항해에 나설 때 자신들이 갈 곳을 알려주는 지도를 지니고 있었다. 저자는 그 지도가 바로 정화함대에 의해 만든 것이라고 밝혀내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콜럼버스보다 먼저 중국인들이 아메리카로 항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수없이 많이 있고 심지어 이와 관련된 문헌들이 두 권짜리 참고도서 목록으로 요약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콜럼버스보다 70여년 먼저 탐사

개빈 멘지스는 뛰어난 중국 제독 정화와 홍보(洪保), 주만(周滿), 주문(周聞), 양경(楊慶)제독들이 디아스보다 60년 먼저 희망봉을 회항했고,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으며, 쿡 선장보다 300년 먼저 호주를 탐사했다. 남극과 북극은 최초의 유럽인보다 400년 앞서 통과했고, 아메리카는 콜럼버스보다 70여 년 먼저 탐사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개빈 멘지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중국은 1405∼1433년 사이의 3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세계를 주름 잡는 세계 최대의 함대를 건조했다는 점이다. 또한 중국을 제외하고 경도나 위도를 측정하고 거대함대를 거느리고 항해할 수 있는 나라가 그 당시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명나라의 해군력과 경제력이면 세계의 여러 지역을 경락하면서 세계지도를 작성하고 세계적 해양 대제국을 건설할 정도의 국력을 가진 유일한 국가였다.

명·청 황제들의 고립주의 정책은 서구세력과 문화에 빗장을 걸고 원양 운항이 가능한 거대한 배의 건조와 해외 무역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어긴 선주와 수부들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중국 고위 관료들은 상업이나 물리적 힘보다는 우수한 문화로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은 유럽 국가들이 군사적 팽창을 시작한 100년 후보다 더 우수한 해군력을 당시에 보유하고 있었으나 스스로를 무장해제 하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당시의 군사력과 기술력은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과 견줄 만큼 우수하고 뛰어났지만, 외부로부터의 확장을 추구하는 정책에서 벗어나 고립을 자초함으로써 중국의 눈부신 문명과 문화는 서구문명에 밀려 침탈을 당하는 수난의 시대를 맞이하고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민족은 아무리 부강하고 영토가 넓어도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쇠멸한다는 것을 중국을 통해 역사는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족함이 없을 만큼 넓은 영토와 풍부한 물산을 갖추고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주의의 우물 안 개구리 식 근시안이 가져다준 고립주의는 거대하고 강력한 중국의 힘을 후진국으로 만드는 필연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풍부한 자원,되레 세계화 장애물

그러나 조공체제와 형식주의 외교시스템에 갇힌 중국과는 달리 서구사회는 좁은 땅덩어리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각축을 벌이는 작은 나라로 구성되어 있어 부족한 자원을 다른 지역에서 가져와 채우며 부를 창출해야만 했다. 반면에 중국은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다른 나라와 무역이 절실히 필요한 나라는 아니었다. 풍부한 자원과 인력자원이 오히려 중국의 세계화를 추진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세계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세계중심이라는 중화주의의 좁은 울타리 속에서 잠자는 거인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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