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의 동행
시간과의 동행
  •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 승인 2018.11.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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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이두희 공군사관학교 비행교수

 

우리는 시간과의 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시간의 흐름이요, 시간을 벗어난 삶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의식은 시간의 흐름을 다투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시간은 내가 바라보는 시계 속에, 또는 순서대로 배열된 나의 할 일과 스케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잘 쪼개고 빈틈에다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그것을 늘리거나 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성패가 시간의 적절한 통제에 달렸다고 본다.

사실 시간은 실존이 아니다. 시간은 우리 의식이 사물과 사건을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일 뿐이다. 연·월·일·시·분·초는 시간의 무한한 흐름을 인간이 의도적으로 잘게 쪼개어 놓은 약속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시간을 통제하려 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의 속박에 묶여서 살게 된다. 그리고 인간본능의 자유의지는 그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늘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그 속박에서 잠시나마 탈출해보려는 몸부림 중의 하나가 여행이다. 여행도 계획된 시간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간별로 습관화된 생활의 틀을 깨트리고 변화를 갈망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특히 트레킹 여행은 시간의 흐름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지난 7월 하순,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으로 트레킹 여행을 떠났다. 국토 대부분이 2천 미터 이상의 고지대인 그곳의 한적한 산길은 아름다운 풍광으로 인해 마치 그림 속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곳의 길은 인위적인 면이 드러나지 않는 자연 그대로였다. 말과 야크, 양떼와 목동들이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길이었다. 인위적이지 않는 길에는 수많은 시간이 널려 있었다. 기묘한 모습의 바위와 거대한 빙하, 해발 삼천 미터에 있는 에메랄드빛 자연호수는 장구한 시간이 빚어낸 미술작품이었다. 줄기차게 흘러내리는 개울물만 하더라도 언제 적 하늘에서 내려 쌓인 눈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고 했다.

자연이 스스로 만든 길은 대부분 험했다. 가끔 널찍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평탄한 길도 있었다. 하지만, 높은 산지의 길은 평평하다고 마구 내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곧바로 고산병이 온다. 그래서 그곳에서의 발걸음은 자신의 몸 상태를 살피면서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면 비로소 내가 시간의 흐름과 같은 속도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만 보일 뿐,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의미가 없다. 이때의 시간이란 시, 분, 초라는 단위가 아니라 앞뒤사람과의 거리이거나 목표지점까지 걸어가야 할, 또는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로 인식된다. 산소가 부족하여 숨이 가쁠 때는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의 사이가 여실히 느껴진다. 그 호흡 간의 짧은 시간이 곧 현재이고, 고독한 현재만이 오롯한 나의 시간인 것이다. 산의 정상에 오르니 멀리 하얀 눈에 덮여 마치 거대한 시간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산봉우리들과 내가 걸어온 먼 길이 한눈에 보였다. 그때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왔다. 그 희열 속에는 나만의 시간이란 의미가 들어 있었다. 시간의 틀을 벗어난 자유, 비릿한 땀 냄새가 주는 뿌듯함이야말로 삶에 대한 최상의 보상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시간. 일주일 남짓한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차창 밖 정경들이 낯설어 보였다. 한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떠났는데 벌써 더위도 한풀 꺾여 여름이 다 지나간 듯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떠난 우주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몇십 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는 공상과학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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