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내린 달밤
서리 내린 달밤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8.11.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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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늦가을 저녁은 쓸쓸한 느낌이 들기 쉽다. 거기다 비까지 내린다면 쓸쓸함은 배가될 것이다. 그러나 비가 그치고 나면 하늘은 한결 말쑥해진 얼굴을 하고 나타나 사람들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곤 한다. 특히 저녁 무렵에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불어 저녁 안개를 거두어 가면 밤하늘은 맑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맑아진 늦가을 하늘에 달이 뜬다면, 그 빛은 몹시도 밝을 것임은 자명하다. 여기에 늦가을 밤에 내린 서리가 등장하면 밤의 광경은 시리도록 아름다울 것이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행(李荇)은 비 갠 늦가을 밤의 정취를 시로 잘 그려내고 있다.

서리 내린 달밤(霜月)

晩來微雨洗長天(만래미우세장천) 저물녘 가랑비가 긴 하늘을 씻어내고
入夜高風捲暝煙(입야고풍권명연) 밤이 들자 높은 바람이 어둔 안개 걷어내네
夢覺曉鐘寒徹骨(몽각효종한철골) 새벽 종소리에 꿈을 깨니 뼛속까지 추워도
素娥靑女鬪嬋娟(소아청녀투선연) 달과 서리가 서로 예쁘다고 다투네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늦가을 저녁에 차가운 부슬비까지 내린다면, 사람들은 보통 침울해지거나 상념에 젖거나 하기가 쉽다. 그러나 시인의 눈은 역시 남다른 데가 있다. 시인은 비로 울적해지기보다는 비가 하늘의 검은 구름을 씻겨내고 있다며 반가워한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아예 밤이 되니, 이번에는 바람까지 불어댄다. 보통은 추위를 몰고 오는 바람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고 말겠지만, 시인은 바람마저도 반긴다. 어둔 안개를 걷어내 주기 때문이다.

하늘을 세수시켜 준 가랑비, 어둔 안개를 걷어간 바람은 시인이 기다리는 가을밤의 장관을 연출하기 위해 궂은일을 도맡아 한 고마운 조력자들이다. 이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동안 시인은 깊은 잠에 빠져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일껏 기다린 가을밤의 장관을 놓칠 뻔했지만, 이때 시인의 조력자가 또 하나 나타났으니, 바로 산사의 새벽 종소리였다. 새벽 종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뜬 시인은 잔뜩 기대했던 장관을 보기 위해,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를 무릅쓰고 방 밖으로 나와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하늘에는 시인이 그리던 장관이 연출되고 있었다. 달의 안주인 소아(素娥)와 서리의 여신 청녀(靑女)가 서로 예쁘다며 다툼 아닌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늦가을은 자칫 주변의 쓸쓸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울적해지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시선을 밝은 쪽으로 돌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밝음도 있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던가? 이런 의미에서 늦가을의 울적함은 곧 늦가을의 흥취에 앞서오는 길잡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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