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생활도구 <70>
잊혀져 가는 생활도구 <70>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1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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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봉틀
호롱불 밑의 한 땀 한땀, 드르륵 한번에

글·사진 김운기편집위원
▲ 가정 필수품인 재봉틀 조선시대 명필가인 한석봉의 어머니는 떡장사를 하면서 아들 글공부를 시켰다. 멀리 떨어져 글공부를 하던 아들이 어느날 밤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집에 오자 호롱불을 끄고 석봉에게는 붓글씨를 쓰게하고 자신은 떡썰기를 하는 내기를 해 석봉을 공부에 정진케 했다는 일화는 익히 알려진 옛날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1960∼70년대 이전 가난한 시절 자녀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우리의 어머니들은 부잣집 밥짓는 일이나 농사일을 거들어 주거나 옷 만드는데 삯바느질을 해 쌀을 얻고 돈을 마련해 공부를 시켰다. 이때 재봉틀 1대만 있으면 옷 만드는 솜씨가 좋은 어머니들은 그 수입으로 자녀들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1960∼70년대 신부들의 혼수품 그래서 1960∼70년대 결혼하는 신부들의 혼수바리에 재봉틀과 횃대보가 필수품처럼 따라 갔다. 당시는 옷감을 사다가 집에서 옷을 짓거나 이불을 꿰매 사용했는데, 손바느질로 짓는 것보다 재봉틀이 빠르고 기능이 뛰어나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딸이 시집을 갈 나이가 되면 규수들이 큰 횃대보와 베갯머리에 쓰일 수(繡)를 놓거나 갖가지 혼수 준비를 했다. 또한 혼인 말이 오가고 약혼이 성립되면 소를 팔아서 재봉틀을 사오고 목화를 심어 가을에 수확해 솜이불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시골에서는 뉘집 새며느리가 혼수를 해왔는데, 번쩍번쩍 빛이 나고 보기 좋은 재봉틀을 혼수품으로 가져왔다는 것이 자랑스런 소문으로 퍼질 만큼 인기 품목이었다. 재봉틀은 책상처럼 낮게 놓고 바느질을 하는 손재봉틀과 높이 앉아 발로 바퀴를 돌려 작업하는 발재봉틀이 있었다. 재봉틀은 재봉기(裁縫機), 미싱(sewing machine)라고도 하며 피륙·종이·가죽 같은 것을 바느질하는 기계다. 영국 T.세인트, 처음 기계화 시도 재봉틀은 1790년 영국의 T.세인트가 처음 기계화를 시도하였고, 1825년 프랑스의 시몽이 특허를 얻었다. 1851년 미국의 I.M.싱어가 HA형(표준형) 가정용 재봉기를 개발한 이래 HL형(직진봉)·ZU형(지그재그봉)·프리암형(소매통 재봉이 쉬운 것)의 순으로 개발되었다. 또다른 설로는 1829년 프랑스의 재봉사 바르텔미 티모니예에 의해 발명돼 나폴레옹시대 군복의 대량 생산에 쓰였다는 설과 1755년 독일의 바이젠탈이 발명했고 1804년 영국의 토마스 스톤이 특허를 획득했으며, 미국의 헌트(1834년)와 호위(1846년)가 뜨개 바늘대신 재봉틀에 바늘을 달아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했다고 한다. 재봉틀은 손틀·발틀로 시작하여 전기재봉·전자재봉·컴퓨터재봉틀의 순으로 성능과 소재면에서 다양화·전문화·자동화 및 경량화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38년 재봉기제작소에서 재봉기의 수리를 시작한 이후 1957년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자금으로 가정용 재봉기 전용기계를 도입하여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한 이래 알루미늄 다이캐스팅 지그재그봉·프리암형 전기재봉기까지 생산돼 가정에 보급됐다. 한복문화가 양복 ·양장문화로 바뀌면서 남자들은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춰 입고, 여자들은 양장점에서 멋있는 옷들을 사 입으므로 재봉틀 인기가 줄기는 했지만 한때는 재봉틀 상점들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밀수품으로 들어온 일본 재봉틀을 사들인 집은 보물처럼 여겼다. 필자가 소백산 자락 시골 동네에 갔는데, 한 할머니집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재봉틀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할머니는 문을 닫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사연을 알아본즉 할머니 큰며느리가 시집 올때 가져와 당시에는 마을에서 처음 보는 것이라 동네 여자들의 옷을 재봉틀로 만들어 주면 잡곡으로 값을 받아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보물 같이 여기던 며느리가 뱀에 물려 죽고 재봉틀만 남아 할머니는 그것을 며느리 혼처럼 여겨 고물장수들이 찾아와도 팔지 않고 있다는 가슴아픈 사연이었다. ▲ 1960년대 농촌계몽사업의 일환으로 당국에서 마을을 순회하며 부녀자들에게 재봉틀 사용법을 전수했다.

박물관에 가보면 옛무덤에서 발굴된 명주천 수의 옷이 촘촘한 바느질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마치 재봉틀로 박은 듯이 바느질 올이 반듯하고 한 땀 한 땀 간격이 정교하여 우리 조상들의 바느질 솜씨를 다시 보게 한다. 가정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재봉틀은 지금도 봉제 공장에서는 필수로 기성복을 만드는 여공들의 한도 담겨있다. 70년대 산업화시절 우리네 누나 여동생들이 봉제공장에서 재봉틀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가며 밤잠을 설쳐가며, 옷을 만들고 봉제인형을 만들어 팔아 국가경제를 부흥시켰다. 일부 가정에서 아직 재봉틀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얽힌 가슴아픈 사연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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