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 숨결 생생 충청지역 '선교의 요람'
천안에서 예산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신례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다시 서해안 합덕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여사울 마을이 보인다.
이존창, 충청도에 최초로 복음 전파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여사울'(餘村·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충청도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된 곳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출생한 그는 1780년대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김범우의 집에서 권일신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와 계명 그리고 신심생활을 배우고 루도비꼬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스승 권일신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존창은 충청도 선교에 전력을 기울이게 됐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와 학덕과 신망이 두터웠다.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전해듣고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운 무려 300여명. 그의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양반층에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교리를 전해듣기 위해 이곳 저곳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그의 집은 늘 북적였고, 선교활동과 함께 가성직 교계의 교회시대에 충청도를 담당한 신부로 활약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게 된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더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펼쳤다. 고향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교활동을 펼쳤다. 그로 인해 홍산도 곧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 그 후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가 귀국한 후, 이존창은 주신부로부터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주 신부의 훈계를 명심한 그는 순교를 결심했다.
황새 바위에서 50세 일기로 참수
1795년 말에 이르러 이존창은 다시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날같은 훙터만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때 발굴된 유물들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이존창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현재 신례원 본당의 공소가 있다. 이마을 주민 80% 이상이 천주교 신자다. 이는 여사울이 선교의 요람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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