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60>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60>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1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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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 숨결 생생 충청지역 '선교의 요람'

 천주교와 내포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은 유교적 신분 질서가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양반 신분을 살수도 있고, 상민도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얼마던지 양반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분변동이 심했던 사회였다. 그러나 정치의 부패와 착취는 더욱 더 심해져서 백성들은 압제(壓制)에 시달리며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1770년대, 사회 개혁을 꿈꾸던 일부 남인 계통 실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선교사가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천주교 신앙은 순전히 조선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이어 충청도 내포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고, 그 중심에 내포출신 이존창이 있었다. 충청도에는 순교지와 교우(敎友)촌 등 천주교 성지(聖地)가 많다. 특히 내포지역에 합덕 솔뫼, 신암 여사울, 합덕 신리공소(公所)와 구합덕 성당, 해미 순교지, 홍주 감영터, 당진 신평성당, 아산 공세리성당 등 관련 유적지가 집중되어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이존창에 의해 현재의 충남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었다. ▲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했던 여사울 공소가 지금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신앙의 못자리 '여사울 공소'

천안에서 예산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신례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다시 서해안 합덕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여사울 마을이 보인다.

이존창, 충청도에 최초로 복음 전파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여사울'(餘村·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충청도에서 최초로 복음이 전파된 곳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출생한 그는 1780년대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김범우의 집에서 권일신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와 계명 그리고 신심생활을 배우고 루도비꼬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스승 권일신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받은 이존창은 충청도 선교에 전력을 기울이게 됐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주와 학덕과 신망이 두터웠다.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전해듣고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운 무려 300여명. 그의 복음 선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양반층에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교리를 전해듣기 위해 이곳 저곳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그의 집은 늘 북적였고, 선교활동과 함께 가성직 교계의 교회시대에 충청도를 담당한 신부로 활약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게 된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더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펼쳤다. 고향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교활동을 펼쳤다. 그로 인해 홍산도 곧 천주교 마을이 되었다. 그 후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주문모 신부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가 귀국한 후, 이존창은 주신부로부터 "그대의 배교로 교우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였으니 어떻게 넉넉히 보속을 하겠는가 순교만이 그대를 용서받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주 신부의 훈계를 명심한 그는 순교를 결심했다.

황새 바위에서 50세 일기로 참수

1795년 말에 이르러 이존창은 다시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날같은 훙터만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때 발굴된 유물들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이존창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현재 신례원 본당의 공소가 있다. 이마을 주민 80% 이상이 천주교 신자다. 이는 여사울이 선교의 요람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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