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1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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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샘 추위
한 신 구 <교사>

눈이 날린다.

매서운 강풍을 타고 희끗희끗 수평선을 그으며 아파트 옆 숲 속으로 뿌옇게 빨려 들어간다. 보름전만해도 완연한 봄이었는데, 다시 겨울이 오듯 연일 영하의 날에 눈까지 날리고 있다. 마스크를 쓰고 두꺼운 점퍼 속에 몸을 웅크린 채 동산에 올랐다. 말이 꽃샘추위지 한겨울 날씨보다 더 맹위를 떨쳐 공연히 객기를 부렸나 후회가 되었지만, 산마루에서 만난 함박눈의 유혹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암갈색 빈 가지들만 적막하던 숲 속이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며 주먹만한 눈송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온통 고요 속에 가득하고 꿈속처럼 포근히 내리는 눈은 골짜기를 금세 하얗게 칠했다. 길도 사라지고, 낙엽 위로 쌓인 눈에 미끄러져 엉금엉금 산을 내려 왔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하염없이 내리던 숲 속의 눈은 올 겨울이 주는 선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영 달랐다. 거친 눈보라에 눈을 뜰 수가 없다. 보름 전 성급히 찾아 온 봄바람에 반소매를 입고 훌라후프를 돌리던 경쾌한 아낙들의 몸놀림과 웃음소리가 먼 추억처럼 아득하다. 얼굴에 닿는 차가운 바람과 차츰차츰 적셔지는 눈발의 느낌은 깊은 겨울 숲 속에 길 잃고 헤매는 아이처럼 황량하다. 혼자만의 세계가 주는 호젓함과 고즈넉함까지,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 눈 일거라는 아쉬움까지 더해져 내리는 대로 녹아 스며들고 마는 눈송이를 허우적거리며 두 손에 잡아 본다.

재작년 백년만의 3월 폭설로 솔가지가 부러져 휑해진 비탈을 지나, 봄마다 영산홍 화사하던 무덤가를 돌아난다. 금방이라도 눈을 뜰 것 같던 여리디 여린 작은 망울들이 애처롭다. 긴긴 겨울을 힘겹게 기다려와 이제 봄인가 싶어 나오려던 부지런한 생명들이 심술궂은 추위 앞에 너무도 무력하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리던 오솔길 가의 조팝나무에 뾰족이 돋아나던 푸릇푸릇한 새 순들은 새카맣게 얼어 버렸다. 아마 올해엔 지지난해의 개나리처럼 꽃도 많이 피우지 못할 것이다.

봄은 새 생명의 탄생이다.

그러기에 더 힘겹고 경이로우며 귀하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계절이지만 자연도 온갖 시련을 겪는다. 하물며 인간은 어떠하랴.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사람을 찾고 사랑과 이해를 구하며, 일과 의무 속에서 옆도 뒤도 둘러볼 새 없이 달려온 지난날들이 어떤 의미로, 무슨 형태로 남아 오늘을 지탱하게 할까. 생명의 값만큼 주어진 삶의 무게 앞에서 시시때때로 힘겨워하고 피해가고자 버둥거리던 나약하고 무책임했던 날들이 꽃샘추위로 위로 받고 싶어진다.

어쩌다 마주친 낯익은 얼굴들도 희미한 미소만 흘린 채 묵묵히 사색에 잠겨 마지막 겨울을 붙잡고 걷고 있다.

그렇게 요란하던 까치들도 어디로 사라졌는 지 기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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