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 두 분 : 법정2
난초 두 분 : 법정2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8.09.1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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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법정 수필집의 표제어가 된 `무소유'라는 짧은 글의 주제는 난에 대한 애착이다. 난 기르는 것을 군자의 덕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동양권에서 난은 고매한 인격의 상징이다.

난, 기르기 어렵다. 그래서 난을 기를 정도면 보통 사람이 아니니 훌륭하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게다가 난을 죽이는 가장 큰 이유가 물을 많이 줘서이니 과유불급(過猶不及) 곧 절제의 미학이 그 안에 숨어있으니 부덕한 사람이 기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난은 권력의 상징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난 자체가 투자의 물건이라서 건달들이 자주 만졌고, 난은 또한 권력자들의 승진용 선물로 애용되었다. 비싼 난은 수천만 원도 하고 난의 품성을 닮지 못한 사람들이 난을 주위에 두길 좋아했으니, 난의 수난은 참으로 얄궂다.

나도 난을 받아보았다. 수십 분을 받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쥐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가 뭐 길래 웬만한 사람들 부조금에 해당하는 돈을 들여 이를 사서 보내냐는 것이다. 물론 반가운 이름도 많다. 업무랑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멀리서 보내 온 것은 더욱 기뻤다. 그러나 이미 상품화된 난은 진정 자기가 기르던 난을 보내는 것과는 거리가 없을 수 없다.

법정이 거처를 옮겼을 때 어떤 스님이 난초 두 분을 보내온다. 애지중지(愛之重之) 키웠던 모양이다. 봄에는 은은한 향을 피우는 연두색 꽃과 파릇파릇한 잎을 늘 보았다니 말이다. 난에 관한 책도 사보고, 이상한 이름의 비료도 주고, 겨울에는 방안 온도를 낮추는 등 정성을 다했다.

장마가 끝날 때다. 큰스님을 찾아뵈러 길을 떠났는데,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쨍쨍 내리쬐기 시작했고, 불어난 물소리를 이기려 매미는 목청을 돋구고 있는데, 이를 어째, 난초를 그냥 밖에 내놓고 나온 것이다. 마음이 급해 서둘러 돌아와 보니 잎은 이미 처져 있었다. 샘물을 떠다 물을 주고 잎이 살아났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

법정은 이때 깨닫는다. 난초 두 분 때문에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멀리 떠날 생각조차 못하고, 잠깐이라도 나갈 때는 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들여놓고 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독한' 집착이었다.

말 없는 도반이 찾아오자 법정은 난을 그에게 선뜻 주어버리고 만다. 그제야 그는 해방감을 느낀다. 3년 동안 얽매어있던 난으로부터 그는 풀려난 것이다. 생명(법정은 불가의 말로 유정有情이라고 말한다)이라서 서운할 법도 한데, 3년의 정분으로부터 홀가분해진다.

법정은 간디 어록을 떠올린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고, 가진 것은 물레, 밥그릇, 담요 여섯 장, 그리고 대잔치도 않은 평판뿐'이라고 한 말에 몹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인간의 역사는 소유의 역사이고, 소유의 역사는 이해(利害)의 역사이고, 물건에 성이 차지 않아 사람도 소유하려 들고, 제 정신도 갖지 못하면서 남을 가지려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휴일도 없다는 것을.

송란(送蘭)의 계절이다. 직장의 보직에 난이 오간다. 권력욕이 부끄러워 숨기듯 그 배경에 난이 펼쳐진다.

지금 내가 가진 난은 청청(靑靑)한 잎이 아니라 회회(恢恢)한 잎만 지닌 말라죽은 분 하나가 전부다. 직원이 관리하느라 공연히 애쓰는 것 같아 모두 주어버렸다. 물 줄 일이 없어 너무 편하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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