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노예
사랑의 노예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18.09.19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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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바람의 온도가 하루하루 틀리다. 자연의 절기는 신비하다. 더위가 누그러져 처소로 든다는 처서가 지나니 용케도 선선함이 찾아왔다. 건들마는 식지 않을 것 같던 더위를 거둬가고 그 자리에 가을을 데려다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 풀들은 생장을 멈추고 안으로 탄탄한 씨를 만들고 과일들은 막바지 향을 곰삭힌다. 들은 온갖 결실로 분주해진다.

우체국 안이 과일로 잔뜩 쌓였다. 복숭아와 사과, 멜론으로 가득 채워져 달콤한 향은 덧거리로 따라왔다. 농부들의 7월 어정, 8월 건들처럼 보냈는데 이렇게 바빠지면 가을이 왔다는 증거다. 그보다 추석이 가까워졌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다. 이맘때면 농가에서 주문을 받은 과일들이 선물이란 꼬리표를 달고 우체국에 장사진을 이룬다.

올해의 여름은 무더위로 힘들었다. 사람들은 서로들 살아남은 것이 용하다고 농을 한다. 과일의 당도는 올랐는데 가물어서 크기를 키우지 못했다는 푸념을 쏟아 놓기도 한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다는 자연의 이치는 농사에서도 예외일 수가 없는가 보다. 햇빛과 바람 그리고 비까지 자연이 내주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자연을 받아 드릴 수밖에 없는 게 농부의 순명인 것이다.

오후 4시가 되어 과일들이 다 빠져나갔다. 다시 우체국이 텅텅 비었다. 여향(餘香)만이 남아 과일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서서히 단내가 사라져가며 퇴근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달달한 향으로 과일을 실컷 맛본 하루였다.

이날, 집에 돌아오니 아파트 문 앞에 시커먼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놓고 간 모양이었다. 안을 보니 실하고 먹음직스러운 복숭아 다섯 알이 들어 있다. 아마도 선물 받은 한 박스에서 반을 덜어 온 듯한,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일부러 좋은 걸로만 골라왔을 법해 보인다. 아무에게서 어떤 메시지도 받지 않았건만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이는 연락이 오려니 하며 먹어보자고 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 같다. 둘이서 복숭아로 달달해진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도 자진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점점 비관적인 생각으로까지 나를 몰고 갔다. 위층이나 아래층을 잘못 갔다 놓은 건 아닐까.

복숭아를 슬쩍 우리 집에 갖다놓은 사람은 우렁각시가 되고 싶은 것일까. 왜 모습을 감추고 있는지 모를 노릇이다. “묻지마”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범죄, 폭행, 살인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지러지게 놀라는데 이런 일로 나를 놀라게 하니 야속하기만 하다. 묻지마에 예민해져 있는 요즘은 이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남의 것을 먹은 것 같아 찜찜하여 견딜 수가 없으니 말이다.

오늘도 우체국에 과일 상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소포를 부치러 온 손님이 맛이나 보라며 검은 봉지를 내민다. 조금씩 흠집이 난 복숭아가 짙은 향을 발산하고 있다. 한껏 미각을 유혹하는 순간, 그때 먹은 복숭아가 소화가 다 되고도 남을 지금에 와서 더부룩하니 늦은 체기가 올라온다.

복숭아의 꽃말은 사랑의 노예라고 한다. 내내 마음이 우렁각시의 생각에 사슬로 묶였다. 무엇을 해도 유쾌하지 않은 노예가 되었다. 이 사슬이 언제 풀릴지 모른다 해도, 그렇게 묶고 있다 한들 사랑까지 저당 잡히기야 하겠는가. 반생애에 있어 이미 한 사람의 사랑의 노예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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