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 풍경
오일장 풍경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18.09.1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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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김순남 수필가

 

인근에 있는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추석이 얼마 남지 않은지라 이른 아침부터 장은 북적인다. 장에 오면 마음마저 왠지 부풀어 오르는 듯하다. 어린 시절 할머니, 어머니를 따라 장터에 갔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이런 장에서나 만날 수 있는 물건들과 풍경에 대한 반가움 때문이리라.

장터 입구에 트럭을 대놓고 펼쳐놓은 채반, 키, 대나무 주걱, 삼태기 등 짚으로 만든 토속 공예품들. 주로 오래전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쓰시던 생활 도구들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쓰이는 물건들도 있다. 구경만 하고 있어도 정겨워 한참을 눈요기하다 그냥 돌아서기 섭섭해 대나무 주걱과 젓가락 등 자잘한 소품 몇 개를 샀다.

추석 대목이 코앞인 만큼 차례상에 올릴 제수용품들 인기가 대단하다. 어느새 토실토실한 알밤을 한소쿠리 담아온 할머니는 됫박에 가득 담은 밤을 비닐봉지에 담느라 손이 분주하다. 생선 좌판을 펼쳐놓은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가 시장통에 울려 퍼지자 건너편 채소장수가 화답하듯 목청 높여 손님을 부른다.

장날에는 물건에만 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선 좌판 앞에서 동태포 한봉지와 조기를 사는데 한참을 기다려야 했지만 대형마트 계산대 앞에서 기다릴 때처럼 지루하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옆에서 물건 흥정하는 소리, 건너편에서 부부가 정답게 꽈배기 도넛을 튀겨내는 모습, 묘기를 부리듯 채칼이나 다지기로 채소를 썰어대며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입담도 장에서나 볼 수 있는 덤이 아닌가.

과일 좌판 앞에 서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올여름 그 무덥던 뙤약볕과 긴 가뭄을 무던히도 잘 견디어 내고 살을 올리고 발갛게, 또는 노랗게 본연의 색을 내며 영글었는지 과일에나 농사를 지은 농부에게도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여름 기록적인 무더위에 남편과 함께 밭에서 삼복더위를 보냈지만 수확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터라 농부의 노고가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봄에는 냉해 때문에, 여름에는 가뭄으로 고난을 겪다 보니 올해는 과일 작황이 좋지 못하다. 다른 해 보다 과일 값이 조금 더 나가지만 차례상에 풍성하게 올리고 싶다. 과일이 들어가자 시장 가방이 묵직해졌다.

북적대는 시장통에서 조금 비켜나 골목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주택 담장 밑에도 난전이 펼쳐졌다. 도라지와 고사리를 파는 할머니는 옆에 박나물을 곱게 썰어서 담아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예전 이맘때면 어머니께서 박나물을 해주셨다. 그 맛이 어린 나의 입맛에는 맞지가 않았었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옛 음식이 그리운 나이가 되니 가을이면 박나물을 꼭 한 번씩은 해서 먹어본다.

시장에는 생동하는 기운이 있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는 상인들의 열정과 좋은 물건 조금이라도 싸게 사서 풍성한 우리의 명절 한가위를 보내려는 마음들이 모여 생동감이 일어난다. 한해 농사를 그르친 사람도, 기후의 악조건 속에서도 대풍을 맞은 농산물을 팔지 못해 애태우는 농부도 추석을 앞둔 대목장에서는 모두 조금씩 위로받고 힘을 얻는다. 알밤과 도라지, 박나물을 펼쳐놓고 오랜만에 만나는 손자, 손녀들한테 용돈이라도 쥐여주고 싶은 할머니들의 소박한 꿈들이 피어나는 장날 풍경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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