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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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윤희 한국교통대 한국어강사
  • 승인 2018.09.1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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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박윤희 한국교통대 한국어강사
박윤희 한국교통대 한국어강사

 

시어머니의 49제가 되었다. 지난 설 명절 연휴에 잠을 잘 못 자서 고개가 안 돌아간다며 힘들어하셔서 병원에 가게 되었다. 평소에 아픈 곳은 없던 분이 병원에 3~4개월 이상 병실에만 있다가 보니 다리에 힘도 더 없어지고 잘 드시지도 않으셔서 기운이 없어 하셨다. 뚜렷한 병명이 없다 보니 병원에서 퇴원하라고 했지만 걷지 못하시니 집으로 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달도 안 되어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슬픈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장례식장에서는 예전처럼 대성통곡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조문객들이 어머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느냐는 질문에 남편은 여든 여섯이셨다고 대답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조의와 명복을 빈다고 하시며 “그래도 호상이시네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 후로도 오신 조문객마다 모두 호상이란다. 뭐가 호상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연로한 연세에 고생 안 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시면 호상이란다.

7년 전에 간 장례식장이 새삼스럽게 기억이 난다. 50대 초반 한참 나이에 남편을 잃은 12살 차이의 아내와 어린 세 아들이 남겨진 장례식이었다. 너무나 슬프고 서럽게 우는 가족들의 모습에 나도 울컥했다. 순간 미래 있을 나의 장례식을 상상해 보았다. 내가 죽으면 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해 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살면서 나의 죽음을 슬퍼해 줄 사람이 있을 만큼 열심히 살고 싶었다. 그 후로 가끔 나는 죽음을 상상하며 내 장례식에 올 조문객이 누군지 손꼽아 본다. 진정으로 슬퍼해 줄 사람이 10명이나 될까? 고민하게 되었다.

여든여섯 나이의 죽음을 호상이란다. 모르겠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그러나 언제 죽음을 맞이해도, 어떠한 죽음도 호상일 수는 없다. 이 모든 건 살아남은 자의 입장인 것 같다.

19년 전 친정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8년 전 큰 올케의 죽음 앞에서도 우리는 남은 가족 입장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누군가가 죽은 후에도 태양은 다시 또 떠오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지는 게 인생인 것 같다. 이 또한 슬프다.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다는 말과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기보다는 남아 있는 자에게 더 관대하다. 그래서 사람들 하기 좋은 말로 호상이라 말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남아 있는 자에 대한 배려일까? 나 역시도 타인의 장례식장에 가면 상주에게 말한다. 좋은 곳에 가셨을 거라고.

우리 가족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듯 살아가고 있다. 파란 가을 하늘을 보니 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며 내 귓전에 “호상이란다! 호상이란다!”라는 말이 자꾸 맴돌아 메아리쳐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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