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의 동쪽 경계, 충주 금릉동유적
마한의 동쪽 경계, 충주 금릉동유적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8.09.1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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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선사(先史)와 역사(歷史)를 연결하는 시기인 마한. BC 1세기~AD 3세기에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을 무대로 발전하였으며, 54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3세기 무렵 이들 마한 소국 중의 하나가 충주지역에도 존재했다는 고고학적 자료가 충주 금릉동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충주역에서 제천방면 3㎣ 지점. 광명산(팽고리산) 남쪽으로 해발 100m 내외의 독립된 능선이 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충주세무서가 들어서 있다. 2004년 세무서 청사신축을 계기로 충북대학교 박물관팀이 발굴조사를 하여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능선은 남북방향으로 약간 길죽한 타원형태인데 능선 서사면 끝자락에 구석기시대 유물층, 능선 남사면 하단부에 고려~조선시대 무덤, 능선 상단부에 마한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이 능선은 개간과 경작, 과수원, 초지조성 등으로 여러 차례 지형변화를 겪어 왔으나 다행스럽게도 이곳에 남긴 문화흔적(유구, 유물)은 훼손되지 않고 본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의 물음에 충실한 답을 주고 있다.

금릉동 유적은 마한의 무덤으로 대표된다. 토광묘 162기, 옹관묘 1기 등 163기의 마한 무덤이 조사되었다. 토광묘는 능선 정상(해발 97.2m)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면에 무덤의 긴길이 방향이 등고선방향과 나란하게 매우 조밀하게 축조되어 있으나 중복된 것은 없다. 또한, 중서부지역의 둥근밑단지가 부장되는 무덤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주구묘(周溝墓)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도 주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무덤 축조가 입지선정, 공간배치 등 매우 체계적인 축조계획에 따라 짧은 기간에 축조되었음을 의미하며 타지역과는 다른 매장문화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이 유적에서 주목되는 것이 능선 정상부에 조성된 13기의 합장묘이다. 매장주체부는 모두 목관을 사용하였다. 84호 목관의 수종분석 결과 주목으로 밝혀졌다. 주목이 관재로 사용된 예는 평야 토성리 목곽묘, 평양 오야리 19호 낙랑고분 등 매우 드물다. 금릉동 합장묘는 낙랑 목곽묘의 변화양상과 궤를 같이하고 관재도 같은 수종을 쓴 점에서 낙랑문화와의 깊은 친연성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금릉동 마한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도기류, 철기류, 청동기류, 구슬, 숫돌, 칠기 등 1200여점이다. 토기는 둥근밑단지와 깊은 바리가 대부분으로 단순한 편이나, 토기 중 기마인물상 손잡이 달린 뚜껑 항아리는 이 지역에서는 처음 출토된 것으로 주목된다. 말을 제어하는 도구인 재갈, 유력자가 소유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둥근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과 말모양허리띠고리[馬形帶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3세기대에 이미 말갖춤이 있었고, 충주지역에 마한 소국 중의 하나가 존재하였음을 알게 하여 준다. 또한 철모, 철촉, 철부 등 무기류와 농공구류의 철기가 많이 출토된 것은 이 지역의 특성, 즉 충주 칠금동 제철시설과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금릉동 유적은 무덤양식, 출토유물상 등으로 볼 때 천안, 공주, 청주 등 중서부지역의 마한문화와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어 마한문화권역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충주일원의 남한강유역이 마한의 동쪽 경계에 해당될 가능성을 높여 주는 고고학적 자료를 금릉동 유적이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 유적은 백제의 영역확대와 함께 충주의 고대사 전개에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이해된다.

현재 충주세무서 민원실 입구에는 금릉동 유적 출토 주요 유물들을 복제 전시하고 있다. 어색할 수도, 이색적일 수도 있는 몇 점의 전시유물은 우리에게 교훈적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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