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의 주동자 손병희 선생의 생가를 찾아서
3·1혁명의 주동자 손병희 선생의 생가를 찾아서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8.08.1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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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유난히 뜨거운 여름 날씨, 청주에서 증평으로 가는 큰길 옆 북이면 금암리 시골길을 달린다. 바로 의암 손병희 선생 생가와 유허비가 있는 곳이다. 1979년 9월 29일 충청북도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이곳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 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초가집으로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손병희 선생은 1861년 이곳에서 아버지 손두흥과 둘째 부인 경주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자 출신이라는 신분적 차별을 경험하며 방황의 시기를 보내던 선생은 1882년 22세 때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에 매료되어 동학에 입교하여 동학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과 논산에서 관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후 선생은 원산·강계 등지로 피신하였고, 1897년에는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어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이후 선생은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 동덕 등의 교육과 문화 사업에 힘쓰기도 했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인사동 태화관 독립선언식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투옥되었다.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치료 중 상춘원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하였다.

손병희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은 3·1운동을 주동한 것이다. 기독교, 불교, 유교 등과 연합하고 각계의 저명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움으로써 거국적인 민족 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독립선언서 작성은 최남선이,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오세창이,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여장이 인쇄되고 배포되었다.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이후 지속적,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광복을 맞이한 백범 김구 선생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였다고 한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가 오늘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라고 절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는 사실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의 업적과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위치를 단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손병희 선생이 없었더라면 동학 혁명도, 3·1혁명도, 대한민국임시정부도, 광복도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있는 해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손병희 선생의 96주기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더욱 깊게 다가온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우리 국민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한 손병희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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