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3.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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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엔 어떤 일이
임 정 순 <수필가>

토요일 오후, 겨우내 나서지 못한 등산을 내가 먼저 서둘렀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남편이 의아해 하면서 채비를 한다. 늘 뒤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던 나를 밖으로 내몰아 세운 것은 달력속의 입춘이다.

성급한 마음으로 얇게 입고 나온 탓이지, 저만치 가려던 겨울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어 아직은 춥다. 남편은 빠르게 걸으라며 앞에서 재촉하지만 내 걸음은 영락없이 뒷짐 지고 육거리 장구경하는 여인네 같다.

양지 쪽 개나리가 제일 먼저 봄 맞을 채비를 한다. 무수히 떨어진 솔잎이 폭삭한 구름 솜을 깔아 놓은 듯 그 형체를 알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지나간 흔적인가. 움푹 파인 곳에 가랑잎이 수북하다. '가랑잎에 불 붙는다'라는 속담을 생각하니 섬뜩 발걸음이 멈췄다.

아마 이때 쯤 일게다. TV를 보는 딸에게 아주 멋있는 것을 보여 줄테니 밖으로 나오라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감상하려고 마당 잔디에 성냥불을 그어 댔다. 금방 불이 붙지 않아 입으로 불며 딸을 얼른 나오라 재촉했다. 새까맣게 원을 그리며 점점 타 들어가는 모습이 금방 물감으로 색칠해 놓은 듯하다. 내가 하는 양을 쳐다본 딸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난데없이 어디서 불어오는 훈풍인지 불길이 금세 커지면서 빠르게 번진다. 겁이 덜컥 났다. 내 키 반 만한 주목나무가 순식간에 타 버렸다. 불과 2, 3초 만에, 목이 터져라 딸을 불러 보지만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딸은 TV에 빠져 있다. 쏜살같이 빗자루로 사정없이 불길을 잡으려 해보지만 쉽사리 잡히질 않는다.

아뿔사, 봄 불은 여우 불이라더니 꺼지는가 하면 이쪽저쪽 날아다니며 약올린다. 이러다 애써 가꾼 정원수도 다 태우고 집까지 불붙는다면, 아찔하다. 미친 듯이 빗자루를 휘두르다 보니 불길에 녹아 버린 몽당 빗자루는 더 이상 소용이 없다. 얼른 수돗가로 쫓아가 고무 호수로 사정없이 물을 뿌리니 불길은 서서히 사그라졌다.

불을 보고 놀란 강아지는 줄을 끊고 대문 밖으로 줄행랑을 치고, 그 난리법석인데도 딸은 나오질 않는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벌어진 사건에 혼비백산한 얼굴은 불장난하던 꼬맹이 얼굴같이 얼룩덜룩하다. 타버린 주목나무 자리에 대신 서 있으라며, 집안을 한바퀴 둘러보던 남편은 하마터면 집까지 태울 뻔했다고 나무란다.

겨우내 잠잠하던 대지가 꿈틀대는 봄은 매번 나를 가만 두질 않는다. 빗장 안에 숨어 있던 욕망이 대지의 기운을 받아 분출하는 용암처럼 불을 뿜는다.

마흔여덟 봄에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여자이기를 포기해야 하는 신체변화에서 오는 우울증을 탈피하기 위해 일상의 탈출은 오직 운전에 도전하는 일이라고 남편을 설득했지만, 한마디로 무시했다. 하지만, 물러서면 결코 운전대를 잡을 수 없다는 고집에 끝내 소형차를 구입했다. 퇴근하고 돌아 온 남편은 키를 내놓으라며 며칠을 가지고 다녔다. 대문 앞에 서 있는 차를 하루에도 몇 번씩 내다보며 다소곳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이전보다 더 나긋나긋하게 대했다.

그런 내게 남편은 조심에 조심을 다짐하며 키를 주었다. 헌데 다음날 깜빡이를 켜고 40킬로로 대전엘 갔다 오는 모험을 했으니, 내 급한 성격에 운전하는 모습을 친정어머니에게 보이고 싶었던 것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우울증을 한방에 날린 운전은 지금도 자랑스럽다.

빨간 넝쿨장미가 만발하고, 가로수 잎이 반짝일 때 비로소 불을 뿜던 용암은 잠잠해진다. 들뜨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이때면 각종 씨앗을 파종하고 고추나 가지, 토마토를 심어 놓고 흐뭇한 눈길을 줄 때다. 어디서 오는 걸까. 비우지 못하는 탐심과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끊임없는 도전의 근원지는.

저만치 남편이 앞서간다.

올 봄엔 또 어떤 일을 벌일지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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