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59>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59>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2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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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홍주읍성

성벽엔 믿음의 절개 지킨 순교의 흔적이…

 성벽에 맺힌 신앙의 넋 '홍주읍성'

▲ 조양문의 과거와 현재 =조양문의 과거와 현재.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으로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현판은 대원군의 친필이다.

충남 홍성은 최영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과 사육신 중 성삼문 등을 배출한 곳이다.

또한,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며, 충청도에서 공주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서해안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온 홍성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곳으로 그 관할 범위가 넓었던 만큼 순교자도 많았던 곳이다.

홍주지방, 1791년부터 박해 시작
홍주 지방에 박해가 시작된 것은 기록상으로는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이다. 신유박해(1801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로부터 병오박해(1846년)에 이르는 동안 순교자들의 처형지로 사용됐던 군청, 객사, 동헌과 읍성 구석구석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교우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 전해 준다.

이 지역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치명 일기'에만도 80여 명의 명단이 전해지지만, 전체적으로 명확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관할지역의 범위와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상당수의 교우들이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성읍 시가지를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조양문이다. 조양문은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홍주성의 동문이다. 당시 홍주군이 관할하던 넓은 지역에서 붙잡혀 온 교우들은 이 문을 통해 홍주성 안으로 걸어 들어간 그들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다.

홍주성은 홍성읍 한복판, 남산 공원에 쌓은 810m 규모의 성곽으로, 축조연대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다. 조양문의 왼편으로 골목을 조금 돌아가면 군청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대원군이 친필로 쓴 현판이 붙어 있는 홍주 아문(洪州衙門)이 있다. 홍주 아문은 홍주성의 동문인 조양문과 함께 사적 제 231호로 지정돼 있다 .

아문을 돌아 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고목들과 신자들이 오랏줄에 꽁꽁 묶었을 법한 기둥들만이 당시 순교자들의 숨결을 전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고, 숨을 거둔 순교자들이 누구이며 몇명인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관할지역의 규모와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홍성군 내의 문서에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부분들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시급한 상태다.

 홍성의 신앙 증거 터와 순교 터

1)목사의 동헌(현 안회당 서남쪽)
이곳은 조선 시대 때 홍주 목사(정3품)의 동헌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본래의 동헌(즉 근민당)은 현존하는 동헌(즉 안회당, 사적 231호)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천주교 지도층 신자 문초한 곳
   
▲ 박해 시대 때, 목사의 동헌 앞에서 천주교의 지도층 신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박해 시대 때, 목사의 동헌 앞에서는 천주교의 지도층 신자들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박해자들은 갖은 유혹으로 배교를 이끌었으며, 남은 가족들을 들먹이면서 육정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때 원시장(베드로)은 "하느님께서 저를 부르시고 계시니, 제가 어찌 그 분의 음성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유혹을 뿌리쳤다고 한다.

홍주 관아로 끌려온 순교자들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굳게 신앙심을 지켰다.

2)홍주 진영(현 한국통신 건물 자리)
홍주 진영(즉 충청도 전영·前營)의 동헌(경사당)은 지금의 동문(즉 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자리로 추정되고 있다.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던 영장의 동헌 앞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았다.

3)홍주 옥터(옛 홍성 법원 및 검찰청 자리)
옛 홍성 법원 및 검찰청 자리는 조선시대 홍주 옥이 있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1791-1869) 홍주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은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굳게 신앙을 증거한 뒤, 이곳 옥에 수감되어 꿋꿋하게 순교할 것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홍주 옥터는 신앙심을 굳게 지킨 곳으로, 신자들이 순교를 결심한 자리이기도 하다.

4)홍주 저잣거리(홍성군청 앞)
홍주의 저잣거리(즉 옛 장터)는 신자들이 관아로 끌려갈 때, 처형되기 전 조리돌림을 당했던 곳으로 지금의 홍성군청 앞이다.

5)홍주 북문교 옆 참수터
홍성읍 북문교 옆(북문교 서쪽)의 월계천변. 1801년의 황일광과 1868년의 유 마르타(교수형의 가능성도 있음)가 참수형을 받은 장소는 지금의 홍성읍 북문교 옆(북문교 서쪽)의 월계천변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옛 홍주성 북문 밖 20m 지점인데, 월계천이 북문교와 만나는 곳으로 일반적인 처형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1868년 5월 최법상(베드로) 등 4명이 순교한 생매장 터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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