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2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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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밝은 밤에
정 상 옥 <수필가>

살아가면서 그 어떤 것에도 더 이상은 욕심내지 말자 했건만, 어느 날 문득 가슴이 휑하니 공허해지고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빠져들 때가 가끔씩 있다. 오늘 저녁이 그랬었다. 참으로 고운 황혼이 물든 서녘하늘을 바라보면서도 가슴속은 왠지 찬바람만 불었다. 흙 냄새 나는 찻집에서 차 한잔을 마시며 시린 가슴을 데워보려고 모닥불 앞에 앉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 찻집 안을 온기로 채웠지만, 뜻 모를 서글픔에 시린 가슴까지는 데워지질 않았다. 뜰로 나가 나목이 되어버린 감나무에 기대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소담스런 보름달이 발그레하게 떠올라 있다. 저녁내내 이것을 찾아 헤메고 있었던 것일까. 내내 허전하고 쓸쓸한 고독에 시달렸던 가슴은 탐스럽고 넉넉한 보름달을 담고 싶은 간절한 욕망의 꿈틀거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감정을 쉽게 들어내는 일에 익숙지 못하던 내가 대청댐을 향해 달렸다. 대청호의 사위는 고요했다. 솔향기 불어오고 맑은 달빛 그득하니 그야말로 청풍명월 그대로다. 차가운 하늘위에 덩그러니 떠오른 보름달을 보니 저녁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허무와 동요가 차분히 가라앉고 이상한 설렘이 일었다. 오랫동안 나른한 무력감과 삶의 권태 안에서 허우적대던 의식이 호수의 찬바람과 잔잔히 내리는 부드러운 달빛으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듯했다. 그 느낌은 황홀했고, 삶의 희망 같은 설렘 같았다.

나는 항상 그랬다. 끝에 닿았다고 체념하고 나면 마음속 어느 구석에서부터 작은 희망이 다시 솟아 오르곤 했었다. 아니, 그런 작은 희망속에서 세상을 부정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모자람을 자책하며 살려했었다. 속절없는 과욕으로 흔들릴 때면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자신을 책망하다 다스려지지 않는 자괴감에 빠져들던 날도 무던히 많았다.

청정한 달빛에 온몸을 적시며 있노라니 허욕으로 물들었던 자신이 한없이 옹색해지는 기분이다. 삶의 끝자락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부풀리기만 하던 헛된 욕심이 무색해졌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라 했건만 나의 삶에 찌든 나태와 허욕은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수록 더 부풀리기만 하며 살아온 건 아닐는지. 항상 당당하고 자신 만만하게 살려 했던 것이 혹여 자만은 아니었을까.

만삭의 보름달을 불당골 기슭에 떼어놓지 못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집에 오니 달이 먼저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마 떨치고 들어갈 수 없어 겨울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받으며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은은한 달빛으로 온몸을 적시며 내 살아온 생을 돌아보니 아등바등 바쁘게 뛰어온 사십 여년의 세월들이 한낱 부질없어 보인다. 무엇을 얻고자 함이었으며, 또 남은 것은 무엇이 있는지. 뛰는 사람에게도, 걷는 사람에게도 보름달은 더도 덜도 아닌 똑같은 모습으로 넉넉하고 온유한 빛을 내려 주고 있는 것을….

요란하지 않게 잔잔함으로 다가와 자비롭고 후덕한 모습으로 세상의 밤을 비추다 때가 되면 슬며시 기울어져 갈 줄 아는 여유로움을 닮고 싶어 달빛 아래서 서성이며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동행한 벗들도 아무런 말이 없다. 하나 둘 흩어져 달빛 쏟아진 호수를 내려다보며 깊은 상념의 늪에서 보름달이 주는 무언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인지. 올해는 여유로운 마음과 바라만 보아도 푸근해지는 넉넉한 사랑으로 내 가슴속에 달하나 띄우고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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