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로 부인의 묘지명을 쓴 이문건
조선 최초로 부인의 묘지명을 쓴 이문건
  • 김홍숙<괴산문화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8.04.1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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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홍숙

이문건(李文建)1497~1567)의 자는 자발, 호는 묵재와 휴수이다. 본관은 성주이다. 9대조인 이장경은 경산부원군으로 농서군공에 추봉되었는데 이는 성주이씨 중시조격으로 안일호장으로 등과하여 관계에 진출했다.

8대조 이조년은 시조 [다정가(多情歌)]로 유명하며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문렬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부친 이윤탁은 승문원부정자를 역임했다. 아들 이온은 일찍 죽었으나 홍문관수찬을 증직받았다. 손자는 양아록(養兒錄)의 주인공 이수봉(李守封)이며 첨정을 지냈다.

이문건은 서울 주자동에 살았으며 그는 둘째형 충건과 정암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종8년 1513년 20세에 큰형 홍건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남들은 화를 당할까 봐 정암 조광조의 죽음에 조문하지 못했으나 묵재는 중씨와 예를 갖춰 조문하고 장례를 지냈으니 그는 사제의 도리를 다한 강직한 선비였다.

1528년 35세에 별시문과에 합격하고 승정원 설서를 거쳐 사서가 되었다. 이후 1545년 52세에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을사사화에 이문건도 연좌되어 성주 옥산리에서 가족과 함께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58세에 손자 이수봉을 얻지만 6년 후에는 외아들 이온을 잃는다.

그는 23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74세인 1567년 2월 서거했다. 묵재는 유배지에서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와 유평리 일대에 거처할 기반을 마련해놓았다. 묵재 별세 후 손자 이수봉과 가족들은 대명리로 오게 되었다.

이문건의 교유관계는 `묵휴창수'에 등장하는 이황, 조식, 김효갑, 이이, 신잠 등 수십 명이 있으며 가계와 사우관계를 통해볼 때 유수한 가문으로 그 자신 사림으로서의 위상도 상당했다고 한다. 이문건은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며 근본적인 이유는 공맹(孔孟)유학은 물론 성리학을 올바로 공부했기 때문에 고도의 심리학자가 되어 이를 문학과 예술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리하여 세상 만물의 이치와 학문에 뛰어났다.

그가 쓴 `양아록(養兒錄)'은 손자 수봉에게 식견을 갖춘 사대부다운 인물로 교육하는 과정을 기술한 현존 최고의 육아일기이다. 그는 단계적 발전의 원리와 자기계발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어 16세기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을 알 수 있다. KBS 1TV 방송국에서 [역사추리 조선시대 육아리포트-할아버지가 쓴 손자의 육아일기]와 2009년 5월 [역사추적-조선 선비의 육아일기]로 2회 극화 방영하였다. `묵휴창수'는 이문건이 회갑을 맞아 이이, 이황 등 당대 저명인사 33명의 친필 한시를 모아 엮은 현존 최고 최다의 회갑기념 창수한시첩이다. 이것은 16세기 사대부들의 충군우국의 도리와 곤경을 당해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자세를 잘 알 수 있고 우도 및 서체, 서품, 서풍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의 금석문과 서예미학을 살펴보면 그의 효심을 부모님 묘비에 담았는데 훼손하지 못하도록 묘비 이름을 `영비(靈碑)라 하고 한글로 경고문을 새겨 놓았다. 이는 2007년 9월에 보물 제1524호로 격상되었다. 묵재는 그 부인이 고생한 사연을 숙부인 김씨 묘지명에 표현했다. 이는 남편이 쓴 조선시대 최초의 부인묘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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